분단의 恨 묻힌 생태계'실낙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1면

"지뢰잡이를 만나 봤습니까? '민북''민남'이 무슨 말인지 압니까?"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르며 남북한을 가르고 있는 DMZ(비무장지대)는 알고보면 우리 대부분에겐 관념 속의 땅이고 상상 속의 나라다. '20세기 냉전문화의 유적' '자연 생태계의 보고'라고들 하지만 그도 말뿐이다. 저자 함광복(52)은 앞의 질문과 함께 관념 속 DMZ의 음울한 실체를 펼쳐 보인다. 물론 TV화면에 비친 그림같은 이미지나 현지근무를 했던 군인들이 전하는 '전설'과도 구분된다. 그는 강원도 토박이로 30년 가까이 DMZ를 지켜본 그 지역 언론인이며 'DMZ운동' 지킴이이기도 하다. 그가 발품을 들여 모은 자연과 인간에 관한 눈물겨운 이야기를 들어볼 일이다.

#'생태계의 낙원'이라고?

DMZ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변 정동마을에서 동해안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동호리까지, 폭 4㎞·길이 2백40㎞의 띠모양이다. 여기에 민통선이 남쪽으로 덧붙여져 있는데 그 가운데 민들레 벌판이 있다.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도창리로, 철원· 김화· 평강 땅이 조금씩 만나는 곳이다. 구멍 숭숭 뚫린 화산돌이 많다고 '멍돌뜰'이었다가 이내 '먼들'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여기엔 생명력 강하다는 민들레조차 피지 않는다. 대신 늙은 버드나무 숲, 새, 고라니와 너구리가 판을 치고 깨진 포탄 껍데기가 지천이다. 낭만적일 리 없다.

뿐만 아니다. 전략 요충지인 이 땅에는 국군이나 북한군을 가릴 것 없이 지뢰를 경쟁적으로 묻었다. 세월이 흘러 어떤 지뢰가 얼마나 묻혔는지 알 길이 없는 '지뢰 미확인 지대'가 됐다. 길섶을 한 발짝만 벗어나도 지뢰 귀신이 우글대는 지옥의 땅이 DMZ의 실제 모습이다. 흩날리는 민들레 꽃씨 대신 사람잡는 지뢰가 만발한 들판은 자연 생태계의 마지막 보고라는 통념을 거부한다.

DMZ는 '전쟁 생태계의 보고'라는 저자의 얼핏 낯설어 보이는 주장은 이런 DMZ의 실제 모습에 기초한다. 좁은 곳은 불과 몇 백m를 사이에 두고 남북한이 대치한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시계 확보를 위해 화공·고엽제 공세가 자연을 유린했고 땅굴과 참호, 중화기가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평화도 아니고 전쟁도 아닌 이상한 전쟁터, 야생동물도 안심 못할 곳으로 변한 것이다.

# 거기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광주산맥의 주능선이 흘러가는 철원군 김화읍 근남면에 '울진촌'이 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에 오갈 데 없어진 경상북도 울진사람 66가구가 들어와 개척한 민통선 마을이다. 이들은 10년 넘게 묵힌 주인없는 옥토가 내 땅이 된다는 부푼 꿈을 안고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60년 4월 나흘간의 긴 여정 끝에 도착한 이들을 맞은 것은 찬 바람과 군용 천막이었다. 그리곤 그만이었다. 부정선거 여파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이들은 최전선 지뢰밭 한가운데 내팽겨쳐진 꼴이 됐다.

어느 연대장의 권유로 술을 빚어 군인들에게 팔고, 아낙네들이 탄피를 허리춤에 숨겨 나가 쌀과 바꿔 연명하면서 이들은 황무지를 옥토로 바꿔 놓았다. 지뢰에 몸을 상한 이들도 적지 않았고 아이들은 수업 중에도 폭음이 들리면 논밭에 나간 부모 걱정에 맘을 졸여야 했다.

이후 40여년, 민통선 1세대들이 목숨을 걸고 개간한 65만평의 옥토는 지금 70%가 남의 땅이 됐다. 원지주들과의 토지분쟁, 90년대 초반의 민통선 지역 투기바람 탓이다. 그들은 자식들을 소작농으로 만든 대신 개척정신을 남겨 주었다. 대도시로 간 이곳 출신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때도 귀향한 사람이 없다. 모두 '억척 정신'으로 버텨냈기 때문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믿고 있다. 또 있다. 지금은 울진사람들도 잊어버린 '덤벙김치'도 이곳에선 담가 먹는다. 바깥세상과 고립돼 고향보다 더 울진다운 사회를 유지한 덕분이다.

끊어진 금강산 전기철도 옆에 휴게소를 짓고 속절없이 열차를 기다리는 부부, 기분 나쁘게 눈이 빨갛다는 열목어를 '김일성 고기'라고 부르던 소년, 고구마대신 대전차 지뢰를 캐어 놓고 기념사진을 찍어 달라던 농부, 모두 저자가 DMZ 30년 여행 과정에서 만난 살아 있는 이들의 모습이다.

# 연어를 따라 돌아오세요

이 책은 통상적인 의미의 기행문으로 분류될 수 없다. 물론 기자로서의 사실 확인도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박수근과 잃어버린 그림 항아리' '궁예와 대장정' '돼지풀이 벌이는 대리전쟁' 등 날카로운 시선이 곳곳에 드러난다. 하지만 자료제시나 해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적 상상력이 가미돼 읽을 맛을 더 했기에 그 점에서는 에세이 쪽에 가깝다. '고미성의 장수하늘소와 연어' '기러기 흰 배와 철새 전쟁'같은 대목이 특히 그렇다.

그 중에서도 강원도 휴전선 부근 출신으로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가 혼자 살아남은 쿠릴열도 파라무셔섬의 '킴씨'이야기(일 NHK보도)는 아득하다. DMZ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압축하고 있는 이 노인에게 휴전선 이북 남강에서 태어난 연어들은 고향 찾아오는 길에 말을 건넨다."할아버지, 우리를 따라오면 한국입니다"라고. 물론 저자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조선에서 떠난 킴씨 노인이 60년 만에 한국의 고향으로, 통일된 고국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염원이 담긴 것으로 읽힌다. 책의 제목은 여기서 비롯됐다.

김성희 기자

jaeja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