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66>제104화두더지人生...발굴40년: 21.경주 안계리 고분발굴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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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당시에는 발굴현장까지 가는 정기 노선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요즘처럼 사람마다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안계리까지 가려면 면소재지에서 걸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면소재지에서 현장까지는 몇리 길이었다. 다행히 월성군청의 협조를 얻어 급한 연락 사항이 있으면 공보실 차량을 이용하는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횡재'는 기대할 수 없었다. 때문에 전화 한통화 하려고 면소재지까지 걸어가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발굴팀은 주민이 떠나가 비어 있는 현장의 빈 집을 한채 대강 수리해서 기거하기로 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40기가 넘는 대규모 고분군을 직접 발굴할 현장인부들을 구하는 일이었다. 주민들은 이미 고향을 떠난 후였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이주 준비에 여념이 없어 현지 주민 중에서 인부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궁리 끝에 경주시 거주자 중 예전에 경주지역 유적발굴 현장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수소문해 불러 모았고, 역시 적당한 빈 집을 한채 골라 기거하면서 발굴을 돕도록 했다. 조사 요원이 아닌 현장 인부들이 집을 떠나 현장에서 숙식하면서 발굴에 참여한 것도 아마 국내 유적발굴조사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안계리 고분발굴은 숱한 추억을 남겼다. 문화재관리국 촉탁직이라는 '말단' 신분으로, 발굴조사 현장팀장을 맡은 대학 선배를 조수 자격으로 옆에서 모신 덕분에 발굴이 완료될 때까지 현장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훗날 생각하면 안계리에서의 경험은 나름대로 평생 동안 현장 발굴조사의 근본으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

발굴과정에 있었던 일 가운데 먼저 천년수(千年水) 소동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고분을 발굴하다 보면 가끔 부장품으로 무덤에 함께 묻혀 있는 항아리 같은 용기에 물이 가득 담겨 있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소위 민간에서는 천년수라 해서 오랜 고질병인 해소병에 좋다는 속설이 전한다. 때문에 집안에 해소병을 앓는 환자를 둔 경우 이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애를 쓰기도 하지만 쉽게 구해지는 물건이 아니어서 애태우는 사람들도 가끔 보게 된다.

어쨌든 안계리 발굴과정에서 우연히 신라시대 무덤 속에 함께 묻힌 토기항아리(土器壺) 안에 물이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항아리 크기로 보아 천년수의 양은 4∼5ℓ는 족히 돼보였다. 말로만 듣던 소위 천년수를 난생 처음 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발굴조사 도중 인부의 삽날이나 곡괭이 날에 토기항아리가 파손되기라도 했다면 천년수를 못만났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항아리 안에는 오물 하나 들어있지 않았고 맑고 투명한 물이 가득했다.

아무튼 이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인부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고 급기야 너도나도 천년수를 서로 먼저 마시겠다고 작업을 중단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마침 김병모 팀장은 업무 관계로 발굴현장을 비우고 없었다. 내가 대신 현장 책임을 맡고 있을 때 그런 일이 벌어져 순간적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년수라고 여기고 인부들이 마시는 것이야 그들의 자유겠지만 만의 하나 배탈이 난다든지 뭔가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은 발굴조사단이 져야 하기 때문이다. 발굴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발굴조사단장의 책임이 되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최종적으로 단장이 판단하는 것이 현장의 불문율이다.

요즘은 휴대전화가 보급돼 현장책임자가 자리를 비워도 얼마든지 상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을 수 있지만 당시는 32년 전이었다. 팀장을 수소문하려면 몇리 길을 걸어 나가야 했고 그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임기응변을 발휘해야 할 순간이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도저히 판단이 되지 않았다. 일단 아무도 마시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인부들은 일손을 놓고 막무가내로 마시겠다고 고집들을 피웠다. 20대의 젊은이가 '중늙은이' 인부들을 통제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 생각하면 무리였다.

고심끝에 내린 결론은 지금 생각해도 '솔로몬의 지혜(?)' 같은 것이었다. 내가 먼저 마신 후 1시간이 지나도 별 이상이 없으면 인부들에게도 마실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일단 인부들의 흥분은 진정시킬 수 있었다.

5∼6세기 신라시대 무덤에 부장된 항아리에 담겨 있었으니 항아리 안의 물은 '일천사오백년수'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인부들은 대단한 노다지를 발견한 양 흥분해 있었고 나는 뱀술에 이어 또다시 '못마실 물'을 마셔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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