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와 인권위의 꼴불견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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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청와대와 국가인권위원회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꼴사납게 번지고 있다. 지난주 청와대는 김창국 인권위원장(장관급)이 김대중 대통령의 사전 허가 없이 외국에 다녀왔다고 공개 경고한 적이 있다. 문제의 출장은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태인권기구포럼(APF) 회의며, 공무 국외여행 규정에 따른 절차(외교통상부장관→총리 통해 대통령 허가)를 밟지 않았다는 게 경고 사유였다. 그러자 인권위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독립기구인 만큼 규정 적용 대상이 아니다"고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장관급 인사가 대통령의 허가 없이 외국에 나간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규정을 따질 것도 없이 국제회의에서 정부 내 협력해야 할 문제 등 국정의 효율성을 위해서도 사전 연락과 협조는 당연한 일이다. 인권위가 독립기관으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다듬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허가 없는 출장을 인권위의 독립성과 연결짓는 것은 무리다. 더구나 청와대 측은 金위원장의 출장이 '불필요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어 인권위의 반발은 개운치 않다.

청와대의 모양새가 형편없이 구겨진 셈이다. 인권을 내세우는 정권이 인권위로부터 한방 먹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청와대가 인권위를 괘씸죄로 다루고 있다는 논란도 찜찜하다. 그동안 인권위의 검찰 내 피의자 사망사건 직권 조사 움직임 등을 놓고 정부 내에서 여러 논란이 있었다. 이런 독자적 행동에 제동을 걸려는 의도가 이번 청와대 경고에 깔려 있다는 의심이 인권위 내부에 있는 것이다. 떨어지는 국정 장악력을 의식한 탓에 金위원장을 공개적으로 망신줬다는 분석도 나온다.

양측의 대립은 임기 말에나 등장하는 코미디 같다. 이런 식이라면 공직 사회의 기강을 잡기가 힘들다. 청와대와 인권위는 논란을 빨리 수습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인권위의 정부 내 위상, 직제를 명확히 재정리해 이런 추태가 재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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