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집삼아 서울서 파리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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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같은 삶을 동경해오던 부부가 일을 저질렀다. 1천만원을 주고 35인승 중고버스를 사들인 뒤 부엌·침실·화장실을 만든 뒤 이 차에 전재산과 가족을 태우고 서울에서 파리까지 4만㎞의 대륙을 횡단했다. 전재산이라고 해봐야 파리까지 갈 수 있는 빠듯한 여행 경비가 전부. 가족은 자기밖에 모르는 여덟살짜리 아들 이구름과 두살이 채 안된 딸 릴라, 그리고 몸무게 45㎏에 달하는 애견(愛犬) 꼬꼿이다.

이들이 과연 중국의 거센 모래 바람과 험악하기 짝이 없는 러시아를 가로질러 유럽으로 갈 수 있었을까. 이 책이 여느 가족 여행기와 다른 점은 모험의 강도 때문이다. 치안이 불안한 지역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의 힘으로 헤쳐 나가고 있다. 그것도 1년 가까이 걸려서다. 부부는 불같은 싸움도 벌이고, 죽을 고비도 넘겨 가며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우친다. 아이들도 편안함에 길들여지지 않고 늘 무언가에 도전하기를 바란다는 부모의 뜻을 조금씩 알게 된다.

'사고'를 친 부부는 프랑스인 사진 작가 장 루이 볼프(40)와 한때 패션모델로 활동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전업한 최미애(37)씨다. 동기는 단순했다. 당구장 하나를 빌려 스튜디오와 살림집을 겸했는데 집주인이 어느날 갑자기 나가라고 하더란다. 오기가 발동해 버스를 사서 집처럼 꾸몄다. 그러자 스멀스멀 찾아온 모험심. 아내가 먼저 제안했다. "우리 가능성을 시험해 보자"고. 아내의 고향 서울에서 남편의 고향 파리까지 버스를 타고 가며 현지인들을 상대로 화장을 해주고 사진을 찍자는 계획도 잡았다.

2001년 8월 30일 인천에서 중국 다롄(大連)항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고달픈 중국 서부지역 횡단기가 시작된다. 개와 버스의 통과를 거부하는 세관원들과 승강이를 벌이고, 정해진 루트 외에는 갈 수 없다는 현지인 가이드와 신경전을 치르기도 한다. 모래 구덩이에 바퀴가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되고, 사막 한가운데에서 버스가 서버리기도 한다. 곤경을 거치며 가족들은 점점 배워나간다. "편안하기만을 바라는 여행으론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여행의 참 매력은 어려움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때 더욱 더 커지는 법"이란 교훈을.

이 때 9·11 테러 소식을 듣는다. 다음 목적지인 키르기스스탄으로 통하는 국경이 곧 폐쇄된다는 사실도 알게된다. 국경문이 닫히기 직전 이들 가족은 50㎞의 험준한 산길을 넘어 국경을 통과한다. 이렇게 시작한 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러시아의 여정은 아슬아슬함의 연속이었다. 오리털 파카를 입고도 추워서 잠을 잘 수 없는 고산지대가 이어지고, 보드카를 마시고 취한 현지인들이 버스를 습격하고, 경찰들은 걸핏하면 시비를 걸고 달러를 달라고 한다. 그러나 오지의 초원에서 인정도 맛본다. 한국의 추석날, 직접 만든 빵과 요구르트를 건네주는 유목민들.

그런데 터키·이탈리아·프랑스를 거쳐 이제는 편안한 비행기로 귀국길만 남았겠거니 하는 시점에서 이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로 되돌아 오겠다고 결심한다. 유럽·이란·파키스탄·인도·네팔·티베트·중국으로 이어지는 여행은 12월 초 나오는 둘째권에 선보인다. 사막의 전경과 귀여운 아이들 모습을 담은 장 루이 볼프의 감각적인 사진을 보는 것도 이 여행기를 읽는 또 다른 맛이다.

홍수현 기자

shinn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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