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끝 '量보다 質'…거품을 빼자:기준미달 대학원 과감하게 통·폐합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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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1991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간 뒤 워털루대학 화공과 대학원을 마친 조정현(28·여)씨는 지난해 가을학기에 포항공대 대학원으로 '역(逆)유학'을 왔다. 교육 환경도 좋고 대학원생들에 대한 지원이 캐나다 대학 못지 않다는 얘기를 선배에게 듣고 내린 결정이었다.

지난 3년간 포항공대 대학원 석사과정의 입학 경쟁률은 4대 1을 웃돌았고, 박사과정도 평균 1.3대 1의 경쟁률을 유지했다. 전국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석·박사 과정 미달 사태가 왜 이 학교에는 없는 것일까. 비결은 대학 측의 투자다.

이 학교 석·박사 과정 학생들의 한 학기 등록금은 2백18만원. 하지만 대학원생 전원은 조교로 임명돼 장학금을 받는다. 매달 석사는 59만원을, 박사는 71만원을 받아 한 학기 장학금을 합하면 등록금보다 많다.

전문가들은 국내 대학원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교육의 질 제고를 위한 끊임없는 투자"를 꼽았다. 또 "양적으로만 부풀려진 대학원의 거품을 빼야 한다"는 데 목소리를 냈다.

◇대학원 거품 빼야=서울대 철학과 허남진 교수는 "일본 대학의 30%만이 대학원 과정을 두고 있는 반면 우리 대학의 경우 무려 90%가 대학원 과정을 설치 중"이라며 "지금의 위기는 80년대에 대학원 설립 기준을 완화해 대학들이 너도나도 대학원을 설립하면서부터 예고된 문제였다"고 말했다.

그는 "교육부가 대학원 교수 정원을 따로 산정하지 않아 대학원 교육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대학에서도 학생을 받아 교육이 부실해지고 있다.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 운영 능력이 없는 대학원들을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강내희 교수는 "대학들이 수입을 늘리기 위해 대학원을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 놓은 데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많은 학생이 취업 도피처로 대학원을 선택, 대학원이 갑자기 비대화한 것"이라며 "앞으로 대학원은 집중화·특성화 기준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고 규모를 조정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연구 풍토 바꿔야=서울대 대학원생 崔모(27·여)씨는 얼마 전 해외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강사에게 논문 작성을 위해 도움을 받고 있다. 이 학과에는 崔씨가 논문을 쓰는 분야를 전공한 교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어차피 교수가 한정돼 있다면 기존 교수의 권위에 매이지 말고 실력있는 박사 등 젊은 강사의 수업권을 보장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국대 독일학과 임호일 교수는 "교수들 스스로 선진국 수준의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성이 일고 있다"며 "대학원생들이 한국에서 공부를 계속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교수들의 연구성과·실력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돼야 하며 교수들 간에도 연구 성과를 평가하고 경쟁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국문학과 조동일 교수는 "대학원이 비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학원을 마친 뒤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라며 "연구교수제를 도입해 젊은 연구 인력들이 안정적으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제공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고 했다.

동국대 철학과 최인숙 교수는 "조교 제도는 대학원생들이 경제적 지원을 받고 교수들은 잡무에서 벗어나 연구에 주력하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며 "현재 조교들이 자신의 학업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일에 치이는 것은 이런 취지에서 어긋나는 만큼 조교 수를 늘리고 재정지원을 확대해 본래 취지를 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소한 생계는 지원해야=대부분의 대학원생은 학비 해결을 위해 부모의 도움을 받거나 과외·번역 등의 아르바이트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국내의 경우 '학업을 장려하는 차원의 장학금' 제도를 두고 있는 곳이 거의 없다.

인하대 대학원 윤영섭 부원장은 "대부분 선진국에서는 대학원생들에게 학비뿐아니라 생활비까지 지원해 능력과 의지만 있으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며 "학비 감면 수준을 넘어 생활비 수준의 장학금을 확보하고 이런 혜택이 학교·학과 구분없이 골고루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순수학문 분야의 경우엔 진로문제에 대한 해결도 급선무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정태헌 교수는 "우리나라에선 한국사 연구자들이 박사 학위를 따도 갈 곳이 없다"며 "한국사와 같이 사회적인 필요는 있으나 이윤을 내기 힘든 학문의 경우 대학연구소를 지원해 고급 인력에 대한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justice@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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