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형 PD들 再演프로 양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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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는 자연계나 정치권에만 있는 게 아니다. 방송계에도 따뜻한 곳을 찾아 움직이는 새들의 움직임은 계절마다 반복된다. 좀 인기가 있다 싶으면 별다른 고뇌 없이 그리로 몰려간다. 요즘 인기 있는 철새 도래지(到來地)는 재연(再演)이라는 땅(포맷)이다.

이번 가을 개편 후 '스토리'라는 말이 제목에 들어간 프로가 셋이다. 시간대를 옮긴 '깜짝 스토리 랜드'(SBS), 남희석·장나라의 '러브 스토리'(KBS2), 임백천이 진행하는 '결혼 스토리'(KBS2)다.

이 프로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이 바로 재연이다. 재연은 일종의 유사(類似)드라마다. 재연이 느는 건 한국의 시청자들이 유별나게 드라마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MBC의 '성공시대'나 '이야기 속으로' 같은 프로 앞에는 다큐멘터리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다큐건 토크쇼건 드라마 형식에 편승해야만 시청자를 끌어 모은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예능과 교양 프로들의 탈(脫)장르, 퓨전 양상을 일종의 드라마 신탁통치로 보는 건 지나친 속단일까.

재연이라는 자막이 등장하는 프로는 현재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 추억 속의 만남을 재연하는 'TV는 사랑을 싣고'를 위시해 과거의 황당 사건을 코믹하게 재연하는 '타임 머신', 혹세무민의 수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신문에 난 사건의 이면을 주로 다루는 '우리 시대', 생활 속의 법률 문제를 파고드는 '솔로몬의 선택' 등이 모두 재연 프로다. 이번 개편에 새로 들어간 것들만 해도 '꿈꾸는 TV 33.3''기적체험 구사일생''우리들의 영웅''발견 천하 유레카''휴먼 TV 유쾌한 세상''김용만 박수홍의 특별한 선물' 등 부지기수다. 곧 파일럿 프로로 선 보일 'TV 로(Law) 죄와 벌'에도 재연이 들어간다고 한다.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는 걸 그냥 말로만 하는 것보다는 재연해서 보여주는 것이 시청자에 대한 친절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유사 드라마에서 보이는 친절은 과잉이다. 과잉친절에는 예의보다 저의가 있게 마련이다.

재연이 늘면서 벌어진 현상 한 가지. 재연 전문 배우의 등장이다. 이들은 PD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고마운 존재들이다. 고분고분하고 출연료가 싸다. 물론 전문성은 떨어진다. 그 반면에 학예회 수준의 어설픈 연기가 주는 재미가 덤으로 온다. 처음엔 낯선 얼굴이 주는 리얼리티가 생명이었으나 워낙 재연 프로가 많다 보니 이들도 겹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재연에서조차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는 탄식이 벌써부터 여의도에 넘쳐난다.

원래 범행의 현장검증에나 쓰던 재연이 이렇게 TV에서 느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쉽게 시청률을 올려준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재연 포맷에 의존하려는 PD들이 모험과 실험을 피하게 될 것은 뻔한 이치다. 대중예술의 새로운 고지를 향해 끝없이 도전해야 할 PD가 안정 희구(希求)세력이 된대서야 말이 되는가. 자존심은 사라지고 경쟁심은 늘어가니 문제다. 가장 큰 문제는 제작진의 분별력에 비해 TV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chjoo@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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