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제일 논객의 미술사 寶庫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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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해 전 김용준이 지은 『조선미술대요』복사본을 구했을 때 설렘은 어쩌면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월북미술가의 저술은 당시 불온문서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스무해가 지난 지금 그 불온문서가 최고 수준의 정교하고 미려한 장정으로 둔갑해 전집의 형태로 품에 안겨 있으니 추억도 새롭다. 근원(近園) 김용준 (1904~67년)은 미술사의 거인이다. 그림 만이 아니라 고전의 향기가 물씬한 『근원수필』의 저자며, 우리 미술사학의 전형이라 할 미술사 저술들까지 누구도 다가서지 못할 높이에 자리잡고 있으니 말이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젊을 적의 김용준은 사상의 나그네였다. 보들레르니, 오스카 와일드를 읊조리며 도쿄 유학시절을 보냈던 그 때 김용준은 당대 일급 프로문예 이론가들과 논쟁을 펼치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 논쟁으로 김용준은 단숨에 일급 논객의 반열에 올라 설 수 있었다. 그 힘으로 김용준은 유학생 대표를 차지하고 따로 살림을 차린 분파 단체를 궤멸시켜 버렸으니 어느덧 1930년대를 휩쓴 소집단미술운동 시대의 좌장이 돼 있었다.

그것도 잠깐 서구 모더니즘에 심취해 있던 김용준은 홀연히 동양정신에 빠져들어갔다. 그런 김용준은 조선의 풍물이나 역사를 그린다고 조선의 그림은 아니라고 비판했다. 조선의 정신을 그려야 한다는 게다.

보이지 않는 정신을 그려내야 했으니 김용준은 그걸 알기 위해 미술문화 유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뛰어난 미술사학자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드나들며, 옛 문헌들을 찾아 읽고, 스스로 서화골동취미에 빠져 살림을 보살피지 않으니 부인과의 다툼도 잦아져만 갔다. 성북동 집 노시산방(老枾山房)을 김환기에게 넘긴 채 의정부로 쫓겨나듯 이사를 떠나야 했던 사정도 골동품을 사들이는 버릇 때문이었을 터이다. 특히 이 때 김용준은 유채화를 버리고 수묵채색화로 전향했다. 미술사학자로 나섰으니 서화일치의 전통을 스스로 겪어보자는 정도가 아니었다. 뒷날 미술사상 기념비로 평가받을 작품을 남겨 놓기에 이르렀으므로 엄청난 전환이었다.

그의 천재는 문사철(文史哲) 겸전의 지식인 전통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창씨개명을 거부한 선비정신도 그렇거니와 미국인을 총장으로 앉히려는 국립대학종합안에 반대해 주저없이 사표를 내버렸던 것이다. 월북해서도 그같은 강직함을 발휘해 조선제일의 논객임을 과시하는 또 한권의 명저 『고구려고분벽화연구』를 탄생시켰다.

이렇듯 뛰어난 업적과 열정의 샘터가 어딘지 궁금하다. 그래서 나는 김용준이 도쿄유학시절 백치사(白痴舍)란 조직을 만들고 백귀제(百鬼祭)란 망년회를 열어 귀신 흉내들을 내며 악마주의에 빠져들었던 낭만의 광기와 더불어 물욕의 허망함을 읊조렸던 그 맑은 정신을 떠올리곤 한다.

요즘은 보기 드물어진 격조 높은 산문 『새 근원수필』(지난해 1월 첫 출간)을 첫권으로 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사 지식의 원전인 『조선미술대요』 『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민족문화 건설의 도정』등으로 엮어진 전집은 그 정신의 실체일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털올 하나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탄식했던 그가 남겨둔 알곡들을 묶어낸 『근원 김용준 전집』은 내가 보아온 어떤 책보다 장정이 아름답고 본문편집 역시 정교하다. 출판문화의 역사쪽에서도 기록해 둘 만한 불후의 노작이 아닐까 한다.

최열<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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