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는 정세, 배울 건 배워오라" 김정일 '南학습' 강행 지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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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거이, 평양으로 돌아가면 시계방을 차려도 되겠구만. "

지난 3일 8박9일간의 서울 방문을 마치고 떠난 박남기(朴南基) 국가계획위원장 등 북한 경제시찰단은 들렀던 지방자치단체와 기업체에서 받은 선물을 정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가장 많은 선물이 손목시계여서다.

당초 이들은 북한 핵파문으로 남한 방문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정세는 정세고, 배울 것은 배워오라"며 예정대로 남한행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74세 된 朴단장은 "장군님(김정일)이 잘 배우고 오라고 단단히 일렀다"며 강행군을 했다. 장관급이 다섯명 포함된 고위급이지만 한명도 일정을 빼먹지 않았고,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은 몸살 때문에 덜덜 떨면서도 참가했다.

북측은 방문기업의 관련자료를 평양에서 챙겨왔다. 그렇지만 현장설명을 듣자 "이거이 몽땅 틀리는구만"하며 당혹했다고 한다. 또 전기·전자·화학·기계·토목 등 분야별로 나눠 전문가가 앞줄에 앉는 등 짜임새 있게 움직였다고 한다. 의전서열보다 효율적 시찰에 신경 썼다는 얘기다. 방문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으로는 서울 구로동의 이레전자를 꼽았다. 朴단장은 "회사 규모도 작은데 매출이 지내(매우) 높다"며 관심을 보였고, 사장실이 따로 없이 툭 트인 공장구조에도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서울 지하철 3호선을 타며 남측 안내원이 휴대전화로 요금을 결제할 때였다고 한다.

지난달 26일 도착 직후 긴장하던 시찰단은 이튿날 '주암회'(2000년 6월 정상회담 남측 특별수행원 모임으로 평양숙소인 주암산초대소에서 따옴) 초청만찬 때부터 풀어졌다. 그렇지만 金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張成澤)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사진촬영도 꺼렸다.

이들은 대통령 선거 등 정치 관련 이야기는 "우리는 배우러 온 경제 고찰단"이라며 아예 언급을 피했다. 정부는 북측 시찰단이 요청한 자료를 종합하고 있다.

특히 국가정보원은 '남한 산업·경제 바인더'란 자료집을 북한 측에 줄 예정이다. 시찰단 얘기가 처음 나온 2000년 가을부터 17억원의 예산을 들여 만든 이 자료는 남한 경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알토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책자·사진·비디오테이프 등 자료와 선물은 곧 판문점을 통해 북측에 전달된다. 朴단장 일행이 곧장 평양으로 귀환하지 않고 싱가포르 등 동남아 경제시찰에 나선 때문이다.

이영종 기자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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