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국제영화제 화제의 두 감독>"내 어릴적 이야기가 영화 상상력의 샘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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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폐막한 제2회 광주국제영화제는 전년보다 훨씬 안정되고 활기차다는 평을 받았다. 이번에 초청된 손님 중 흥미로운 두 감독이 있었다. 데뷔작 '늪' 한편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시네아티스트로 떠오른 아르헨티나의 여성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35)과 1960년대 스타였던 진 세버그에 관한 반(半) 다큐멘터리(다큐와 픽션을 섞어 만든 작품) '진 세버그의 일기'를 들고 온 미국의 마크 라파포트(58)였다.

"어느 남자가 길 잃은 개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왔다. 마땅히 둘 곳이 없어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있도록 했다. 다음날 깨어보니 고양이가 사라졌다. 주인은 개를 수의사에게 데려갔다. '이 놈이 고양이를 먹어 치웠나 봐요, 좀 봐줘요'. 수의사는 도끼로 개의 배를 내리쳤다. 그러자 뱃 속에서 고양이의 이(齒)가 수북히 나왔다. 유심히 살펴보던 수의사가 말했다. '이 놈은 개가 아니오. 아프리카산 쥐에 틀림없소'."

영화 '늪'에 나오는 황당한 에피소드. 이에 대해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은 "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magic realism)풍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쥐가 고양이를 해치우는, 이 현실 도치(倒置)적인 상상력은 남미인들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뭔가 무시무시하면서도 철학적인 성찰을 함축하는 이야기들"이라면서 "어린 시절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이런 옛 얘기를 수없이 들었으며 영화에서 인용한 것도 그 중 하나"라고 말했다.

"감독이 안 됐으면 아마 소설가가 됐을 것"이라는 마르텔의 영화적 상상력의 원천은 이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토속적이고 풍부한 옛 이야기다. 특히 외가쪽에 이야기꾼의 피가 강하게 흘렀다고 한다.

"내 고향은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2천㎞ 떨어진 살타라는 곳이다. 서울~부산의 다섯배쯤 되는 거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일할 때 한번씩 집에 전화를 걸면 어머니는 '내가 말이야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라면서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쉼없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장거리 전화니까 요금이 얼마나 비싼가. 그런데도 한번 입을 떼면 멈출 줄 몰랐다. 그냥 수다가 아니라 상상력으로 치장된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늪'은 무더운 여름에 휴가를 보내는 두 중산층 가족을 통해 타락하고 부패해가는 아르헨티나 사회를 비판한다. 이탈리아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멋진 인생(La Dolce Vita·1960년)'을 연상시키지만 마르텔은 이 영화를 본 적이 없단다.

"영화를 그다지 많이 보진 않았다. 할리우드산 오락영화들만 즐겨 본 편이다. 유럽 영화나 아트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영화를 만들게 된 건 10대 시절 아버지가 사 준 비디오카메라 덕이었던 것 같다.호기심을 갖고 이것저것 찍다보니 영화만들기에 대한 기술과 감성이 저절로 형성됐다."

그러나 영화 만들기를 향한 그의 에너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우러나오는 듯 싶다. '늪'의 출연배우는 세 명을 빼고는 모두 오디션을 통해 뽑은 아마추어. 그는 이들을 뽑기 위해 2년에 걸쳐 모두 2천4백명을 만났다. 그냥 외모를 살펴보고, 간단한 연기를 시키는 통상적인 오디션이 아니었다. 일대일로 앉아서 일일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이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벌써 영화의 한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갸느린 외모와는 달리 집요하고 고집스러운 데가 있다.

영화제 초청을 받고도 "현지에 가면 교통비도 없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어올 정도로 요즘 아르헨티나의 경제 사정은 최악이다. 좋을 땐 연간 1백편 가까이 제작되던 영화가 요즘은 10편을 가까스로 넘는단다. "이제 겨우 한 편 만든 내가 중견감독 대접을 받을 정도"라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마르텔은 능력을 인정받아 유럽쪽 자본으로 현재 두번째 작품을 준비 중이다. '성스러운 소녀(Holy Girl)'라는 제목의 블랙 코미디다.

'신은 왜 나를 이 세상에 보냈을까' 고민하던 소녀가 자신을 추근대던 남자를 보고는 '그래, 저 사람을 교화시키는 게 내 사명이야'라며 되레 그 남자를 쫓아다니게 된다는 이야기란다.

주연 두 명을 뽑기 위해 8백명의 젊은이들과 '기나긴' 대화를 나눴음은 물론이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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