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 칼럼] 옌볜 에 가면 역사가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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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스치는 풍경 속에서 영토 개념이 무너졌다. 옌볜자치주 85만을 비롯해 약 150만 명의 조선족이 만주 전역에 흩어져 살아왔다면 설사 외국의 통치권역에 속한 곳이라도 그곳은 타국(他國)인가, 아닌가? 굽이치는 산세, 버려진 강변, 구릉 밭과 농작물, 촌락 풍경이 너무나 친숙해서 강원도나 경상도 산촌을 지나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곳은 우리일까, 남일까?

압록강변 고구려의 옛 도읍지 지안(集安)에 도착하자 국경 개념이 무너졌다. 한반도 남쪽에서 치어다보는 압록강은 불변의 국경선이지만, 만주에서 남하하다 만난 압록강은 한때 번성했던 고대국가의 생명선이었다. 마치 한강이 한반도 남쪽 지역의 애환을 위무하며 천년의 문화를 가꿔왔듯이, 압록강은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 조선인의 삶의 고난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이었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마치 친숙한 옆 동네로 이주하듯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을 것이다. 그들에게 도강(渡江)은 고국과 이별하는 분단 개념이 아니라, 강 너머 신천지를 고향과 연결시키는 선의 이동 개념이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피 묻은 국경선이 아니었고, 벅찬 꿈과 지친 몸의 도하(渡河)를 지켜온 눈물겨운 손길이었다.

이윽고 옌볜에 다다르자, 이념의 경계선이 무너졌다. 멀리 백두산을 오른쪽에 두고 옌지(延吉)시로 가는 좁은 일차선 도로의 양안에는 현대사의 비장한 유적들이 산재했다. 조국 독립과 해방을 향한 피눈물 어린 얘기가 그곳에 묻혀 있었다. 김좌진의 청산리를 지나자 항일독립군의 근거지들이 다가왔고, 애국계몽과 부국강병의 전사들을 배양한 교육·군사 유적들이 즐비했다. 이주민들의 중심지 룽징(龍井)은 온갖 이념주의자들이 모여들었던 중립지대였다. 조국해방이라는 공통 목표 아래에서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자들이 공존했고 연합전선을 폈다. 옌지시에 거주하는 조선족 40만 명은 이들의 후손들인데, 몸에 밴 공존의 지혜 때문인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이념의 살육전을 이해하지 못했다.

같은 민족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현상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른다. 조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채 간도(間島)에 거주하는 옌볜조선족이 대표적인 사례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 『성』의 주인공 K처럼, 디아스포라는 중심을 향한 애타는 향수와 주변성 때문에 ‘정체성 불명’의 대명사가 되었다. 옌볜에서 만난 동갑내기 이씨-옌볜 태생인 그의 아버지는 농부, 삼촌은 전직 인민군 소좌인데-는 직업상 평양·부산·베이징에서 각각 1년을 보냈다. 본적은 함북 청진. 그는 옌볜 축구팀이 중국 1부 리그에 올라설 날을 고대하며 한국 대기업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다. 여행 가이드 박씨. 본적은 함북 삼수갑산. 기독교 목사였던 조부가 하얼빈에 정착해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이래 아버지 형제는 만주·미국·북한·한국으로 흩어졌다. 한족과 겨루면서 성장한 그녀는 영리하고 행동이 재발라 남한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다. 그들은 다투지 않고 세월을 같이했고 이 시대를 살아간다. 해란강이 휘돌아 흐르는 일송정과, 룽징을 굽어보는 비암산 기슭에 묻힌 선조들의 초라한 무덤을 옆에 두고 말이다. 관용과 공존의 원향(原鄕)이 거기 있다면, 남한과 북한은 오히려 이념대결의 디아스포라, 원형에서 분리되어 결코 귀환하지 못하는 떠돌이가 아닐까.

남루한 옌지공항을 이륙한 날씬한 여객기는 영토, 국경, 이념의 균열을 한 품에 끌어안은 그 원형의 역사를 뿌리치고 압록강을 따라 남하했다. 두 시간 뒤, 그 비행기는 광복 65주년 경축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이념적 디아스포라, 그러나 세기적 성공으로 눈부신 남한에 무사히 착륙했다. 옌볜에서 바라본 남한은 역사의 가두리 양식장처럼 보였다. 귀갓길에 일행은 식당에 들러 거만하게 저녁을 먹었다. 옌볜아줌마가 일하는 곳이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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