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4대 강,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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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렇게 접근했더라면 문제의 소지는 더 작아졌을지 모른다. 누천년 동안 형성된 강(江)의 관념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지리학적·정치학적 개념을 앉히지 않았더라면 지난 2년 반 동안의 소란은 잦아들었을지 모른다. 홍수 때마다 생계터전을 습격하는 저 강물의 방종함을 어쨌든 손을 좀 보겠다고 달려들지 않고 묵묵히 견뎌온 한국인의 미련한 미학(美學)을 지켜갔더라면 ‘4대 강’이 현 정권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소통의 상징’으로 상상되던 강이 ‘차단의 상징’ ‘정쟁(政爭)의 상징’으로 뒤바뀌었기에 하는 말이다.

필자는 한국의 강에 내재된 저 태생적 본성 때문에 손을 봐야 한다는 지리학적 개발 논리에 동의하는 편이다. 만주나 시베리아의 강은 덩치 크고 온순한 개를 닮았다고 한다면, 한반도의 강은 성질 급하고 사나운 늑대와 같다. 1500m 고지에서 발원해 불과 200여㎞를 급하게 달려 바다로 내리쏟는 물줄기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한강은 시베리아를 유유히 가로지르는 ‘고요한 돈강(江)’이 아니고, 낙동강은 만주벌판의 허허로운 초원을 여유롭게 돌아가는 아무르강(江)이 아니다. 급류를 조련하고 탁류를 정수해서 수천 년 방치된 수변(水邊)지구에 가치창출의 기지를 건설하고 강변마을을 21세기적 문명타운으로 탈바꿈하자는 정치학적 개발 논리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 정권의 교두보에 해당하는 ‘4대 강 사업’이 완강하고 집요한 저항에 부딪혔다면 얘기는 달라져야 한다. 판이 깨질 위험을 알고도 ‘옳다고 믿는 바’에 집착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독재정권이 독재적으로 수행한 경부고속도로나 새마을운동이 아니며, 후세의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고 의로워할 일도 아니다.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작별해서 초야에 묻히는 것은 작가가 할 일이다. 당대의 어떤 가치도 수락할 수 없었던 작가 김훈은 당대의 각종 가치들에 휩쓸려 나부끼는 독자들을 감동시킨 작품을 썼다.

정치란 최대공약수에 대한 긴장이고, 이단(異端)과 이견(異見)을 버무려 화합의 묘수를 두는 지혜다. 물막이 보가 폐기 선언된 대운하를 상기시키고, 포클레인이 물총새 무리를 내쫓는 우렁찬 괴물로 비춰지고, 준설공사에서 인공적 재앙을 읽어내는 반대논리가 설사 비과학적·선동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세(勢)를 얻고 공론(公論)을 잠식하고 있다면 주창자로부터 조정자로 변신하는 것이 순리다. 경제영역처럼 성공의 출구전략이 필요하듯, 실패의 출구전략은 이런 때 더 절실하다. 세종시 수정안 폐기와 함께 정권을 상징하는 두 개의 마스코트가 사라졌다고 서운해할 필요도 없다. 할 일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4대 강’은 정권 탈환을 꿈꾸는 반대세력이 상호연대감을 북돋는 연회장으로 자리잡았고, 그런 만큼 2년 전 광화문에 느닷없이 나타난 명박산성처럼 소통차단의 물막이로 변했다. ‘4대 강’ 출구전략, 그것은 현 정권이 끙끙 앓는 소통결핍증을 치유하는 필수적 전제조건이다.

현 정권은 반환점을 돌아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진보(進步)가 내실 없이 소리만 요란했다고 느꼈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보수(保守) 역시 허우대만 멀쩡했지 실력은 형편없다는 지루함이 몰려올 것이다. 사회명사들의 정치가 운동전문가의 정치와 다를 것이라는 세간의 기대는 경제와 외교에서만 약간 입증되었을 뿐 이념과잉과 철학빈곤이라는 한국 정치의 만성질환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모두 업적 내기에 급급해서 정책사업에 목을 맨 탓이다. 더욱이 정권 탈환과 사수의 공방전이 정치의 기본을 망가뜨릴 우려가 지뢰처럼 깔린 내리막길에서 소통과 합의정치를 위한 변신 약속은 팽개쳐질 공산이 크다. 정권 잃고 초야에 묻히기 전에 이런 시를 신중하게 읊조리기를 권한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의 ‘그 꽃’).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