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드래곤' 렉터 박사 役 앤서니 홉킨스 뉴욕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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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을 불러 인육(人肉) 만찬을 베풀고는 입가에 묻은 만족스런 미소를 하얀 냅킨으로 살짝 훔치는 그를 만난다?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았다. 전날 밤 시사회의 공포스런 분위기는 아침까지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만나고 보니 이 또한 난감한 일이었다. 영화 속의 광기를 그의 맨 얼굴에서 찾아내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들의 침묵''한니발'에 이어 연쇄 살인마 한니발 렉터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레드 드래곤'(감독 브랫 레트너). 주인공 앤서니 홉킨스를 뉴욕 맨해튼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촬영이나 여행을 위해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을 텐데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드느냐고 먼저 물어봤다.

"사막이다. 난 사막이 좋다. 사막에서 작품을 해본 적은 없지만 사막의 태양이 좋다."

영화처럼 괴기스럽고 음산한 기운이 흐르는 곳을 좋아하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을 비워 작열하는 사막을 키우고 있다는 그였다. 사막은 그의 연기 혼을 불태우는 그만의 성소(聖所)인가.

사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그에게 허를 찔렸다. 호텔 로비에서 서성이며 그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으나 코 앞을 지나가는 그를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옆에 있던 영화사 직원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내내 그를 기다릴 뻔했다. 청바지에 검은색 티, 그 위에 검정 가죽점퍼를 걸치고 머리엔 쥐색 모자를 푹 눌러쓴 그를 알아볼 재간이 없었다.

-렉터 박사 역을 또 맡았는데 본인이 원했나.

"아니다. 제작자가 그 역을 계속 맡아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렉터 역은 당신이 아니면 누구도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번 역을 맡으면서 내건 조건은 없었나.

"없었다. 단지 세 번째로 같은 역을 맡은 만큼 더 무섭고, 더 광기 나는 인물로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몸무게도 10㎏이나 줄였다."

-당신 나라 영국에서 경(Sir)이란 영예로운 칭호를 받았는데….

"그냥 토니, 아니 당신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라."

뭐, 이런 식이었다. 대스타라 뻐기는 건가. 자신의 성공을 운으로 돌리는 것으로 보아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스릴러물로는 드물게 '양들의 침묵'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1992년)을 받으며 더욱 유명해진 홉킨스. "어떻게 스타가 됐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행운"이라는 답이 나왔다. 좀더 설명을 청했다.

"누구나 그렇듯 욕망을 갖고 내 일을 열심히 했다. 한동안 난 그저 그런 영화에 출연했다. 그런데 어느 날 기회가 왔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엘리펀트 맨'에 출연했는데 흥행성적이 좋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조너선 드미 감독이 영국으로 날아와 '양들의 침묵'에서 렉터 역을 맡아달라고 했다. '엘리펀트 맨'을 보면서 내가 적격일 것 같다고 판단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그 영화에서 난 아주 인간적인 사람이고 렉터는 정반대의 인물이아니냐고 했더니 렉터는 머리도 좋고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나 무엇인가에 잘못 홀려 그렇게 변한 사람이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렉터와는 이렇게 우연히 연이 닿았다는 것이다. 영화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출연하기가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아니다. 주어진 배역을 충분히 연구하고 준비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조로' 출연을 제의받곤 나이도 있고 해서 사실 부담을 느낀 적이 있다. 준비 작업을 위해 멕시코로 가서 한 대가에게서 펜싱을 배웠다. 그는 춤을 추듯 느린 동작으로 펜싱을 가르쳤다. 상당한 훈련을 거친 다음 그는 몸을 빨리 놀려 보라고 했다. 예상 외로 아주 잘 됐다.난 그런 몸의 신경반응을 좋아한다."

연기론 강의는 이어졌다.

"그건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기 전 명상에 잠긴 채 리듬에 몸을 맡기는 연습을 며칠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배역을 맡으면 난 항상 그걸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면 작품에 몰두할 수 있게 되고 연기 연습도 잘 된다. 촬영장에 나오는 것은 그 다음이다."

만일 배우가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쯤 무엇이 됐을까.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혹시 음악가가 되지 않았을까. 소년 시절 피아노를 배우면서 카네기홀에 서는 꿈을 꾸기도 했다. 사실 음악 공부도 제법 했다. 작곡·관현악 편곡 등을 조금씩 배웠다."

이번 영화의 음악을 맡은 대니 엘프먼이 작업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지만 아직은 자신이 없다고 했다. 좀더 공부한 다음 기회가 되면 한번 해볼 생각이라니 언젠가 영화음악가 홉킨스를 만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뉴욕=심상복 특파원

sims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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