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연행사들의 魂이 담긴 醫巫閭山<의무려산>: 바람에 실려오는 홍대용의 탄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조선 연행사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길을 떠난 '신연행록' 답사 5일째, 우리는 선양(瀋陽)을 떠나 랴오시(遼西) 지방을 가로질러 베이전(北鎭)현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으로 향했다. 선양에서 3백20리가 넘는 이 길은 무성한 옥수수 밭이 무작정 펼쳐지는 광활한 대지로 조선의 학자들이 그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무한한 감동을 받으며 걷고 또 걸은 길이다.

조선의 학자들은 의무려산까지 풍광 하나 변하지 않는 길을 나귀를 타고 닷새 동안 길을 재촉하자니 지루함조차 느끼기도 했단다. 그래서 마침내 벌판 위에 우뚝 솟은 의무려산의 장중한 산세를 만나면 저마다의 감동을 말하곤 했다. 노가재 김창업(1658~1721)은 "닷새를 가도 벗어날 줄 몰랐더니 이제야 그 끝에 이르게 되었구나"라고 감탄하면서 "자연이 인간을 만든다더니 이 광활한 대자연이 중국인의 그 여유로움을 낳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의무려산은 그 이름 자체가 이채롭다. 의(醫), 무(巫)는 모두 '무당' 또는 '치료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만주어로는 '크다'(大)는 뜻이 된다. 굳이 새기자면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의무려산은 3천년 전 주(周)나라 시대부터 시작해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열두 곳의 진산(鎭山) 가운데 하나였다.

아울러 장백산(長白山)·천산(千山)과 더불어 중국 동북지역의 3대 명산 중에서도 첫째로 꼽힌다. 또 의무려산은 기자(箕子)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며, 한편 고구려의 옛 영토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연행사들은 이래저래 옛 고향을 찾는 심정으로 이 산을 탐방하였던 것이다.

조선 연행사로서 처음 이 산을 올라 기행문을 남긴 사람은 월사 이정구(1564∼1653)였고, 그로부터 1백여년의 세월이 지나 노가재 김창업이 1712년에 이정구의 유람기를 손에 들고 의무려산에 올랐다.

김창업은 의무려산에 오른 감상을 그림을 그리듯 상세히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관음각(觀音閣)을 지나 산 정상의 절벽에 잇대어 있는 조그만 절 관음사(觀音寺)에서 숙박을 하였고, 샘물이 달고 이슬 같다는 감로암(甘露庵)을 찾았으며, 바위틈으로 난 나무 뿌리를 휘어잡고 있는 관제묘(關帝廟) 옛터로 올랐다. 특히 '도화동(桃花洞)'이라는 세 글자를 발견하고, 여기가 바로 조선에는 없는 선경이라고 감격했다.

도화촌은 의무려산의 남쪽에 있으며, 예전에 1천 그루의 복숭아꽃이 있어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데, 우리는 실제로 1만 그루도 넘을 복숭아가 농원에 즐비한 것을 보았고 막 따온 싱싱한 복숭아를 한바구니 사서 함께 먹으며 그 옛날 김창업의 기행문을 상기해 보았다.

김창업은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능했고, 특히 화가로 일가를 이뤄 겸재 정선(鄭)의 그림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의무려산 마루에 걸터앉아 이 아름다운 절경을 함께 할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며, 일기장에 여섯 겹의 의무려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감로암의 스님은 그의 그림을 보면서 어떻게 산 깊은 곳까지 이렇게 그릴 수 있냐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자 김창업은 그 스님에게 "아름다운 여인은 미운 아이를 낳지 않고, 한 종지 국으로 온 솥의 맛을 알 수 있는 법이니, 어찌 산을 두루 다 편력하고 나서야만 이 산의 본 모습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여유롭게 그림을 그렸단다.

김창업 이후 50년이 흐른 뒤 담헌 홍대용(1731∼1783)이 이 산을 또 유람하고 돌아와 『의산문답(醫山問答)』이라는 철학소설을 남김으로써 의무려산은 연행길의 명소가 됐다. 『의산문답』은 18세기 실학파 지식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실옹(實翁)이라는 선비와 명분·공론만을 일삼는 허자(虛子)라는 두 상반된 캐릭터 사이의 문답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허자는 숨어서 독서한 지 30년 만에 우주의 원리와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의 진리를 깨우치고 세상에 나온다. 허자는 자신의 학문의 깊이가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이라 자부하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학설을 폈다.

그러나 허자는 가는 곳마다 오히려 비웃음만을 사게 된다. 그러자 허자는 '작은 지혜와 더불어 큰 것을 이야기할 수 없고, 비열한 세속사람과 더불어 도(道)를 말할 수 없다'고 탄식하고는 자신의 학문을 알아 줄 선비를 찾아 중국의 연경으로 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알아주는 선비를 만날 수 없었다.

이에 허자는 '철인이 말랐는가, 나의 도가 잘못되었는가'라고 탄식하고는 세상을 도피하리라 생각한다.

바로 그때 허자가 찾은 곳이 이 의무려산이었다.

의무려산에서 허자는 실옹이라는 선비를 만나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마침내 자신이 30년간 해온 공부가 허학(虛學)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고 실학(實學)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실옹과 허자의 대비는 곧 실학사상의 본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홍대용은 왜 이 소설의 무대를 굳이 의무려산으로 했을까.

아마도 홍대용의 눈에 비친 당시 조선의 현실은 허자들이 온통 들끓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세계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 무대를 중국과 조선의 경계라 할 의무려산으로 택한 것이 아닐까. 아울러 의무려산은 바로 의사처럼 병을 치료하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의산(醫山)'이라는 제목이 더없이 적절했을 것이다.

실옹과 허자의 경계, 중국과 조선의 경계,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서 의무려산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현실적 이해득실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21세기에도 명분과 공론만을 일삼는 허자는 여기 저기 존재하고 있다. 신연행길을 가는 우리 답사 여정도 허자가 아닌 실옹을 찾는 과정이리라.

홍대용 이후 2백여년이 흘러 이곳을 다시 찾은 우리는 산의 입구에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친필로 '醫巫閭山'이라 새겨진 웅장한 돌기둥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의무려산 중턱까지 올라 성수분(聖水盆)에서 케이블카(閭山索道)를 탔다. 사전 지식이 없어 그냥 산 정상으로 오르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이 케이블카는 왼쪽 능선을 타고 옥천사(玉泉寺)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조선 연행사들이 즐겨 탐방했다는 망해사(望海寺)·도화동(桃花洞)·관음각(觀音閣)은 보지 못했고, 김창업이 직접 남겼다는 이름 석자와 홍대용이 옛 선배를 따라 새겨 놓았다는 글귀도 찾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옥천사에서 남쪽으로 아스라하게 바라 보이는 발해(渤海)를 볼 수 있던 것은 큰 기쁨이었다. 나는 의무려산의 소나무 숲길을 따라 난 등산길을 거닐며 어쩌면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 의무려산에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다른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번 신연행록 답사에서 무엇보다도 또 다른 '대지(大地)'를 볼 수 있었던 것이 내 나름의 성과다. 1931년 펄벅 여사가 그려낸 왕룽의 아내 아람의 고단한 삶의 현장, 바로 끝도 없이 펼쳐진 고난의 대지와는 다른 모습이다. 오늘날 중국은 어찌됐던 남녀가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보수를 받는 '동공동수(同工同酬)'의 남녀 평등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그야말로 하늘과 대지의 절반을 여성이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중국 곳곳에는 '인인유책(人人有責)'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사람마다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이 표어대로 중국이 남녀의 구분을 넘어 사람마다 국가의 번영과 운명에 책임을 지는 사회로 간다면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감회를 속으로 새기고 의무려산 산자락을 타고 넘어가는 빛 고운 저녁 노을을 보며 산하이관(山海關)으로 향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