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my LIFE] 정병산 대전지검 천안지청 수사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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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정규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대전지검 천안지청 정병산 수사과장에게 가장 큰 고난과 역경은 가난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4전5기, 7전8기 끝에 자신의 꿈을 이뤄냈다. [조영회 기자]

1950년대 말 전남 승주군 산골마을. 일곱 살짜리 꼬마 정병산은 쌍둥이 동생 병윤이와 매일 지게를 짊어지고 산을 다녔다. 땔나무도 지고, 풀을 베 소나 염소를 먹이기도 했다. 산을 지키는 산감의 눈을 피해 몰래 생나무를 가져오기도 했다.

여덟 살이 되면서 친구들이 하나 둘씩 학교에 들어갔다. 부러운 마음에 친구들의 책 봇짐만 바라봤다. 부모님께 졸라봤지만 더 크면 학교에 보내준다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또래에 비해 체구가 한참 작았던 그는 ‘키가 조금 더 크면 보내주시려나’하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부지런히 일하면 학교를 보내준다는 부모님의 말에 열심히 일을 했지만 ‘학교’는 머나먼 나라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학교를 가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부모님이 보내주지 않자 그는 직접 학교를 찾아가 입학원서를 냈다. 학교에 입학한 병산이는 가슴이 뿌듯했다. 그는 원하던 공부를 맘껏 했다. 집안일에 시간을 다 보냈지만 틈틈이 책을 들여다봤다. 그런 열정으로 항상 동생과 1~2등의 자리를 다퉜다.

6학년 졸업반이 되자 친구들은 진학반 비진학반으로 나눠졌다. 병산이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부모님께 중학교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이름 석자만 쓸 줄 알면 된다고 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터라 더 이상 조르지 못했다. 졸업 때에는 졸업비를 내지 못해 학교에 나가지도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성용 담임선생님이 자비를 털어 졸업시켜줬다. 중학교 입학을 포기했지만 담임선생님이 시험만이라도 보라고 권유했다. 중학교 입학시험도 덜컥 붙어 오히려 머리만 복잡하게 했다.

방황이 시작됐다. 그의 마음을 알았던 동네 아저씨가 ‘이발소 일’을 권유했다. 낮에는 손님들의 머리를 감기고 밤에는 공부할 수 있는, 나름대로 좋은 여건이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간 친구들이 보기 싫어 이내 그만뒀다. 부모님께서는 정신 못 차린다고 혼내셨지만 사춘기의 병산이는 이발소에서 친구들의 머리를 감기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다.

가출을 결심했다. 짐을 바리바리 싸고 집을 나섰다. 짐이라고 해야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부상으로 받은 사전과 옥편이 전부였다. 면서기라도 해볼까 싶어 서점을 찾은 그는 ‘검찰’공무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당시 경쟁률이 가장 높았기에 멋진 직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였기에 공부가 쉽지만은 않았다. 영어는 알파벳 한자 써 본적이 없었다. 4번의 시험을 봤지만 낙방의 쓴 잔만 마셔야 했다. 주위에서 비웃는 것 같고 무엇보다도 초라한 자신이 싫었다.

하늘을 바라봤다. 부모님께 마지막 효도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형을 모시고 남산구경을 시켜드렸다.

그리고 결심한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약국을 돌며 사 모은 수면제를 털어 넣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깨보니 병원이었다. 의사에게 혼나고 병원문을 나섰다. 시험에도 떨어지고, 목숨을 끊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세월은 다시 흘렀다.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이제 자살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당시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사가 모두 자신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4년. 4번의 시험을 떨어지고 5번째서야 시험에 합격했다. 이발소에서 틈틈이 한 공부로 자신의 꿈을 드디어 이룬 것이다. 당시 신문과 방송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루느라 떠들썩했다.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6급 주사를 달고 7번 사무관 시험을 봤다. 8번 만에 ‘합격’. 말 그대로 7전8기였다. 장년을 넘어서고 있는 그는 ‘희망의 나침반으로 항해하라’는 책을 썼다. 자전에세이다. 수 년 전부터 ‘책을 출판하자’는 부탁이 들어왔지만 그 정도의 인물이 아니라며 고사해왔다. 끈질긴 부탁을 마다하지 못해 펴낸 책이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의 꿈을 심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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