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폭탄테러]유족들 '숯덩이 시신' 밤샘 식별작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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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30대 초반 백인 여성이라는데 양팔을 구부린 채 죽어 있는 시신은 열살배기 소녀 몸 크기밖에 안돼 보였다. 워낙 시커멓게 타버려 시신이라기보다는 숯덩이란 표현이 맞는 듯했다. 그렇지만 얼굴로 짐작되는 부위에 난 퀭한 구멍 두 개, 배 부위에 튀어나와 있는 창자가 사람의 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람이 폭사한 뒤 불에 타면 몸이 원래 크기의 절반으로 오그라듭니다. 양팔이 구부러져 있는 건 폭발 당시 고통이 극심해 몸부림쳤다는 거고요."

9·11 테러 이래 지구촌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발리 나이트클럽 폭발 테러 발생 이틀째인 14일 낮. 발리의 주도 덴파사르 소재 상을라 종합병원. 발리섬에서 유일하게 영안 시설을 갖춘 이 대형 병원에 테러로 숨진 시신이 전부 모였다.

병원의 하얀 타일 바닥 위에 뻘건 매직펜으로 숫자가 매겨진 노란 비닐 백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병원 측이 이날 오후 공식 집계한 시신은 모두 1백90구. 이중 46구의 신원만이 확인됐다.

비닐 백 속에 잠든 나머지 1백40여구는 얼굴 부위가 날아가 버리거나 타버려 혈육들조차 식별이 불가능하다. DNA 감식이 최종 수단이지만 몇 주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은 의사들을 데리고 시신마다 집게로 입을 열어보며 밤을 지샜다. 금니 등 치아 배열의 특징을 이용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에서다.

폭발에 희생됐을 가능성이 제기된 한국인 관광객 문은영·은정 자매 역시 이런 '치아 추적'의 대상이다. 김동수 발리한인회장과 폭발 직후 자카르타 대사관에서 발리로 급파된 이희성 영사는 13∼14일 이틀간 꼬박 20시간에 걸쳐 시체 1백81구의 입 속을 뒤졌다. 기자가 병원을 방문한 14일 오후 4시가 조금 지난 시간 "99번 비닐 백 속의 여인의 입에서 금니 6개가 발견됐다"는 보고가 이영사에게 전해졌다.

이영사와 함께 시신의 구강 구조를 살펴본 은영씨의 미국인 남편 대니얼 찰스 올슨(31·경남정보대 교수)은 "아내일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이가 안좋아 금니를 6∼7개쯤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99번'이 은영씨일 가능성도 상당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떤 속단도 할 수 없습니다. 은영씨 아버지가 발리에 도착해 시신을 직접 볼 때까지 기다려봐야죠." 이틀째 잠을 못자 핼쑥해진 이 영사는 "병원 측은 14일 오전 희생자 명단에 아무런 근거 없이 은영씨 이름을 올려 한인회 관계자들의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며 "사람의 생사를 놓고 누구도 성급한 판단을 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병원을 나선 뒤 직접 찾아본 폭발 현장은 사람의 생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보여주는 지옥 그 자체였다. 폭발이 일어난 '사리 클럽'까지 1㎞나 남았는데도 경찰이 삼중 바리케이드로 출입을 막고 있었다. 쿠타 경찰서장의 에스코트를 받아 제지선을 뚫고 나아가자 쑥밭이 된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이 통째로 날아가 큰 공터로 변한 사리 클럽 앞 도로엔 직경 2m, 깊이 1.5m의 큰 구덩이가 파여 폭발이 이곳에서 시작됐음을 말해주었다.

거기서부터 3백m 반경까지 무너진 건물과 차량의 잔해가 이어졌다. 폭격기를 동원한 현대전이 개시된 이래 사진에서 낯익게 봐온 공습당한 도시의 폐허가 여기 있었다. 몇 m 앞에 아름다운 청옥색 쿠타 해변이 넘실대는 것만이 좀 다를까.

발리인 운전사 아이얌은 "폭발이 난 다음날 호주인 여러 명을 공항으로 태워줬다. 호주인들은 좋은 손님이었는데. 발리에 재앙이 내렸다"고 한숨을 쉰 뒤 "무슬림의 짓이다. 힌두교도를 미워하는 무슬림의 소행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기자도 발리 국제공항에서 엄청난 참사에 놀라 고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장사진을 이룬 호주 관광객들과 맞부닥쳤다. 그러나 이번 테러의 최대 피해자인 호주를 제외하면 '발리 엑소더스'를 벌이는 외국인은 예상보다 적었다.

특히 한국인 관광객 중 입국을 취소한 경우는 거의 없어 현지 한인 여행업계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다. 현지 여행사를 운영하는 송재철씨는 "매달 3천 명씩 찾는 한국인 관광객 대부분이 신혼여행객들이라 한국처럼 밤에 유흥가를 찾기보다 빨리 잠자리에 드는 스타일"이라며 "이 때문에 그나마 희생이 적었다"고 말했다.

stoncol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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