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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지방자치11년성적표:1."地方육성" 약속 번번이 흐지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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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대중 대통령만큼 지방문제에 역점을 둔 대통령은 없었다. 하지만 DJ도 솔직히 서해안고속도로와 호남선 복선화를 단시일 내에 끝냈다는 것말고는 지방문제 해결에 대해 특별히 내세울 게 없다." 이번 정권에서 재경부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정책기획수석을 지낸 민주당 강봉균 의원의 지적은 방치된 지방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미 거대한 권력이 돼버린 중앙정부는 자신의 권한을 지방에 이전하는 데 인색, 지방정부는 자치의 틀을 제대로 짜지못한 채 중앙에 손을 벌리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광역·기초자치단체들도 각종 선거와 정당의 등쌀에 휘둘리면서 자립·자치 기반이 오히려 약화됐다.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수도권에 대한 각종 규제를 확 풀어야 한다'는 주장과, '지역의 균형적 발전이 우선이다'는 주장이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한 채 공방을 계속하면서 지방정책이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지방의 사회·경제적 여건은 총체적으로 피폐해졌고, 이에 따라 인구와 경제력이 수도권으로 빠져 나가면서 지방 공동화가 심화하는 등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멀기만 한 지방자치와 분권화=2000년 1월 3일. DJ는 신년사를 통해 지방 발전을 위한 획기적 선언을 한다. "각 지역이 고루 발전할 수 있고, 낙후한 지역을 지원하기 위해 지역 균형발전 3개년 기획단을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하겠다."

기획단은 다음달 3일 곧바로 출범, 대기업 본사의 지방 이전과 지방교육 특성화 및 지역 특화산업 육성 등으로 요약되는 75개 개혁과제를 선정했다.

하지만 초기 단계에서부터 중앙부처의 거센 역풍을 맞는다. 기획단 부단장을 지낸 현오석 무역협회 무역연구소장은 "부처 간 의견조정이 가장 어려웠다. 최근 한 대권후보가 거론한 공무원 지역할당제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는 행정자치부가 '말도 안된다'며 반대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고 회고했다.

현씨는 "지방대 육성방안도 교육부의 비협조로 흐지부지됐다. 지역 균형발전은 막강한 리더십이 요구되는 사업인데,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이 총괄했지만 제대로 이뤄진 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기획단 자문을 맡았던 국토연구원 박양호 국토계획환경연구실장은 "기대가 컸지만 정부의 힘이 빠지면서 계획 자체가 유명무실해졌다"고 술회했다.

지방자치의 제도적인 토대 확립도 미흡하기 짝이 없었다. 1999년 1월 '중앙 행정권한의 지방 이양 촉진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8월에는 대통령 직속으로 지방이양추진위원회까지 구성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방에 이양된 중앙사무는 전체 대상 1만2천여개 중 1%도 안되는 1백11개뿐이다.

대전대 안성호 교수는 "DJ 정부 초기 지방분권화 작업은 의욕적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지방정부와 기능이 중복돼 인력과 예산 낭비가 심각한 지방노동청·지방환경청 등 특별지방행정기관에 대한 정비 문제는 단 한번도 지방이양추진위에 안건으로 오르질 못했다"고 말했다.

◇국가 경쟁력 싸고 소모적인 논쟁=국가 경쟁력을 둘러싼 경제논리도 지방자치와 지역 균형발전을 방해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대구상공회의소 임경호 기획조사부장은 "인구·경제의 수도권 집중으로 비수도권에서만 외환위기 이후 2만5천여 기업이 도산했고, 3천6백여 금융기관 점포가 폐업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방의 산업기반이 붕괴되면 결국 국가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피폐한 지방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LG경제연구원 이윤호 원장은 "지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본사와 공장을 지방으로 옮길 수는 없다.

정치논리에 앞서 경제논리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도권 집중문제도 수요·공급이라는 경제원리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의 수도권 규제로 국내 기업의 해외 이전이 90년 5백15건에서 97년에는 1천5백69건으로 급증했다"고 말했다. 실제 수도권에 있던 대한방직·한일합섬·삼성전자 등 대기업들이 중국·동남아·미국으로 잇따라 이전했다는 것이다.

정치권도 이 같은 논쟁에 끼어들어 오히려 갈등만 부채질하고 있다. 지난해 6월 7일 여야 의원 31명은 수도권정비계획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발의자는 남궁석·김근태·손학규·이규택 의원 등 전원 수도권 출신이다. '30년간 지속돼온 수도권 규제를 개선해 산업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제안 이유다.

그러자 같은달 30일 김학원 의원을 비롯한 비수도권 출신 의원들이 이에 질세라 '수도권 집중방지 및 지역 균형발전 특별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처럼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이해가 엇갈리는 법안은 '지역 균형발전 특별법' 등 모두 11건이 계류 중이지만 의견만 맞설 뿐 진척이 없다.

지방자치단체의 조직적 반발도 만만치 않다. 지난 1월 전국의 12개 시·도 경제국장들이 충남도청에 모여 수도권 억제를 완화하는 내용이 담긴 정부의 공업 배치 및 공장 설립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집중 성토했다.

지난해 6월에는 수도권 정비계획법 개정안에 대해 비수도권 12개 시·도지사가 반대 건의문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지방을 살리는 패러다임이 필요=경북대 이종현 교수는 "국민투표를 해서라도 국가적 패러다임을 다시 짜야 한다. 실효성이 의심되는 지방산업 발전법안 등 대증요법 방식의 법안으로는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삼성경제연구소 강신겸 연구원은 '자석론'을 제기한다. "서울에 강한 자석을 놓고 전국에 철가루를 뿌려놓은 형국이어서 모든 철가루가 서울로 몰린다"는 논리다. 그는 "중앙 집중은 지방의 공동화·황폐화·고령화를 가속화하고, 결국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만큼 지역에 또 다른 '자석'을 만드는 법적·제도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와대 지역균형개발기획단 이만섭 정책분석실장은 "유럽의 경우 수도권 집중 억제를 해제하는 추세다. 수도권과 지방이 공존 공영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덕밸리벤처연합회 이경수 회장은 "지역 균형발전이 이미 이뤄진 선진국과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수도권 집중화는 획일화로 이어진다. 다양화·지방화만이 세계화 흐름 속에서 국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지방을 살려야 한다'는 얘기다.

특별취재팀

협찬 : POSCO

◇도움말 주신 분<가나다 순>=▶강근호 군산시장▶강남주 부경대 총장▶강복환 충남도 교육감▶강봉균 민주당 의원(전 재경부장관·청와대 경제수석)▶강순주 경북대 교수▶강신겸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강용식 대전개발위원회회장▶강현욱 전북도지사▶강형기 충북대 교수(지방행정학회 차기 회장)▶강희복 아산시장▶강희성 호원대 총장▶고제철 금광기업 회장▶곽정환 대동㈜ 회장▶구자신 쿠쿠홈시스㈜ 사장▶김경수 춘천상공회의소 회장▶김관용 구미시장▶김극년 대구은행장▶김기태 호남대 교수▶김기현 YMCA전국연맹 부장▶김남득 관동대 교수▶김남철 경북대 교수▶김남철 대전상공회의소 과장▶김달웅 경북대 총장▶김동구 금복주 사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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