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에 걸린 금리정책] <메인> 내리자니…올리자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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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당국의 금리정책이 '덫'에 걸렸다.

물가 상승분을 빼면 실질금리가 마이너스가 될 정도로 금리를 낮췄지만 기업 투자나 가계 소비는 살아날 기미가 안 보인다.

금리가 경제 정책 수단으로서의 효력을 잃었다는 의미다. 반면 단기 자금으로 떠도는 돈이 줄잡아 400조원으로 급증하고 이자 등 기대소득이 줄어 소비가 더욱 움츠러드는 등 저금리의 부작용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에 따라 소수이긴 하지만 금리를 오히려 올려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온다. 그렇다고 금리를 올리자니 투자와 소비가 더 위축될까 걱정스럽다.

더욱이 금리를 올리면 가뜩이나 어려운 신용불량자와 중소기업이 큰 고통을 받는다. 크게 늘어난 주택담보대출(지난해 11월 말 현재 168조5000억원)이 무더기로 부실화할 우려도 있다.

1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8월 12일 금융통화위원회가 콜금리를 연 3.75%에서 3.50%로 내린 뒤 4개월 동안 기업 대출은 오히려 7800억원 줄었다. 이 가운데 7700억원이 대기업 대출이었다.

이자 부담이 줄었는데도 대기업은 대출을 늘려 투자하기는커녕 거꾸로 빚을 갚는 데 주력했다는 얘기다. 금리가 떨어진 데다 모기지론(장기 주택담보대출) 제도가 도입되면서 가계 대출은 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소비 증가로는 연결되지 않고 있다.

한은이 전국 2500가구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가계의 소비지출전망(CSI)은 한은이 금리를 내리기 전인 지난해 2분기 102에서 4분기엔 97로 떨어졌다. CSI는 100보다 클수록 앞으로 소비를 늘리겠다는 사람이 줄이겠다는 사람보다 많고, 100 아래면 반대라는 의미다.

각종 소비 관련 지표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기업과 가계의 체감경기 역시 금리 하락에도 불구하고 더 나빠졌거나 제자리걸음을 했다. 한은은 금리 인하 효과는 6개월 정도 뒤에나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은이 금리를 낮춘 뒤 5개월이 지났지만 금리 하락으로 소비심리가 살아나고 있다는 조짐을 찾기 어렵다.

반면 저금리의 부작용은 속속 가시화하고 있다.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은행 예금이 줄었다. 은행에서 빠져나간 돈은 투자신탁의 MMF 등 단기상품으로 떠돌며 물가 불안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다. 연금이나 이자로 생활하는 노년층과 부유층은 저금리로 이자 수입이 줄어 허리띠를 더 졸라매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은 금리를 올리고 있는 마당에 한국만 금리를 낮춰 외국 자본이 높은 금리를 좇아 대거 해외로 빠져나갈 우려도 커지고 있다. 특히 주식에 투자한 외국 투자가들은 지난해 연말 원화 값이 크게 오르자 환차익을 노리고 주식을 대거 내다 팔았다.

금리 인하를 찬성하는 쪽에선 지난해 금리를 낮추지 않았으면 경기가 더 나빠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LG경제연구원 조영무 선임연구원은 "당장 효과가 안 나타나도 금리를 낮추면 당국이 경기를 살리기 위해 나섰다는 심리적 부양 효과가 크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제는 그나마 심리적인 부양 효과조차 희석됐다는 지적이 많다. 서강대 김병주 명예교수는 "금리가 높아 투자와 소비가 위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금리를 더 낮춰봐야 효과도 못 보면서 부작용만 늘어날 것"이라며 "집단소송제, 접대비 한도제, 부동산 규제 등과 같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없애 돈이 돌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시급하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전효찬 수석연구원은 "국내외 금리 차로 자본 유출 가능성이 있는 데다 물가상승의 불안을 차단하기 위해 콜금리를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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