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밤 정취 담은 바리톤 색소폰의 발라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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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제리 멀리건(1927~96)은 보조 역할에 머물렀던 바리톤 색소폰을 재즈의 주도적인 악기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래서 웨스트코스트의 쿨 재즈 뮤지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44년 자니 워링턴 라디오 밴드의 편곡자로 데뷔한 그는 50여년간 무려 1백20여장에 이르는 방대한 음반에 참가해 재즈의 질적인 발전에 기여했다.

섬세하고 단아한 연주, 뛰어난 작곡·편곡 능력, 밴드를 이끌어가는 리더십 등 다채로운 음악 재능을 발휘했다.

멀리건이 백인 재즈를 대표하는 연주자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실내악적 앙상블을 추구했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쿨의 탄생'(49년)에 참여하면서부터.

그의 단정하고 깔끔한 이미지와 차분한 연주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그가 무대에 서는 날이면 공연장은 언제나 수많은 팬들로 붐볐다.

특히 50년대 초반 쳇 베이커와 함께 결성한 피아노리스(피아노가 없는)쿼텟은 대위법을 구사한 수준 높은 연주와 인간적인 매력으로 대중적인 인기와 음악적인 성공을 동시에 얻어냈다.

깊고 부드러운 숨결을 간직한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63년에 발표한 '나이트 라이트'는 소음이 가라앉은 고즈넉한 도시의 밤풍경을 차분하게 묘사한 최고의 발라드 앨범이다.

멀리건의 피아노 연주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타이틀 곡을 비롯, 영화'흑인 오르페'의 주제가인 '카니발의 아침', 쇼팽의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작품 28'중 제4번 e단조의 편곡 등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는 곡들이 담겨 있다.

짐 홀의 절제된 기타 연주와 아트 파머의 낭만적인 트럼펫 선율이 테마를 형성하고 있으며 밥 브룩마이어의 트럼본은 낮고 깊은 울림이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잔잔하면서도 역동성을 잃지 않는 빌 크로(베이스)와 데이브 베일리(드럼)의 리듬 또한 멜로디의 흐름과 잘 어우러진다.

멀리건은 바리톤 색소폰이 지닌 저음의 매력과 촉촉한 피아노의 선율, 그리고 클라리넷의 우아함을 이 앨범을 통해 표현했고, 쇼팽의 격조를 보사노바로 편곡하는 놀라운 능력도 보여주었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위안과 휴식을 주지만 음악이 끝난 후에는 진한 여운으로 인해 오히려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재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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