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납을 금으로 바꾸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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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선거운동이란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하는 것이었고, 유권자는 표를 줄 테니 돈을 달라고 대놓고 요구했다. 막걸리와 고무신으로 유권자를 매수하던 50년대 우리 선거판 못지않은 풍경이었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주민이 도시로 빠져나가 인구가 줄어든 선거구에서 유권자를 돈으로 매수하는 부패선거구가 흔했고, 지방 유력 가문이 후보를 지명하고 유권자들을 매수 또는 강요해 자기 호주머니 속처럼 좌지우지하는 ‘포켓선거구’도 적지 않았다.

영국 정치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은 ‘영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였다. 1780년 21세 나이에 정치에 입문한 윌버포스는 이른바 ‘클래펌 서클’을 중심으로 양심적 정치인들을 결집시키고, 뇌물로 유권자를 매수하던 정치 관행을 솔선해서 거부했다.

‘물고기는 머리부터 썩는다’는 서양 속담대로 당시 영국 상류층의 퇴폐는 가위 전설적이었다. 조지 3세의 장남인 웨일스 왕세자(나중에 조지 4세)는 동침한 여자가 7000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희대의 색마(色魔)였다. 도박 중독자였던 그의 천문학적 도박 빚은 유유상종하던 의원 친구들이 국고에서 변제해 줬다. 의회에는 알코올 중독이 만연했다. 예의 바른 정치인의 전형으로 불리던 윌리엄 피트조차도 의사당에 술에 취한 채 나타나곤 했다.

윌버포스의 첫 번째 목표는 관습의 개혁이었다. 상류사회의 덕을 세워야겠다고 작심한 그는 의회가 국가의 도덕을 만들어 내는 조폐국이 돼야 한다고 믿었다. 하수종말처리장 수준의 정치판을 1급 상수원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윌버포스는 대의명분을 사회적 압력으로 활용하는 등 용의주도한 전략을 구사하면서 마침내 고위공직자의 과도한 음주, 음란 행위 등 비도덕적인 행동을 적발 및 고발할 수 있는 법령을 선포토록 했다. 도덕성을 강조한 빅토리아조(1837~1901)의 시대정신은 이렇게 탄생했다.

윌버포스가 추구한 또 다른 목표는 노예제 폐지였다. 노예제 폐지는 인기 없는 투쟁이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해상 세력이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북미 대륙으로 수송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노예무역은 그 무렵 국가 수입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노예무역은 이를테면 오늘날 미국의 방위산업만큼이나 영제국의 경제에 중요한 비중을 점하고 있었다. 왕족·귀족·상인 등 노예제 지지 세력은 모든 반대 목소리를 ‘매국(賣國)’으로 몰아 침묵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정치인은 고위직에 오를 희망을 접어야 했다. 개인적 야망을 초월한 목표와 의미를 추구하는 인물이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여론 주도층의 호의를 얻을 만큼 진정성과 설득력이 있어야 했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고 대의를 추구할 수 있는 확고한 신념, 복잡한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유연한 지성을 갖춰야 했다. 두 차례나 암살 위기를 넘긴 윌버포스가 그런 사람이었다.

1833년 7월 26일 승리의 그날이 왔다. 의회는 영제국의 모든 노예들을 1년 안으로 해방시키라는 법령을 포고했다. 그날 윌버포스는 침상에서 죽어가면서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고, 사흘 뒤인 7월 29일 새벽 3시 운명했다. 윌버포스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은 납과 금의 차이만큼이나 달랐다. 정치인을 경멸하던 대중의 태도가 변했다. 윌버포스 이후의 정치인들은 도덕적으로 살거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살거나, 아니면 그렇게 사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윌버포스가 우려한 대로 이는 일부 정치인들의 위선적 태도를 증가시켰지만, 중요한 것은 윌버포스로 인해 정치가 정직한 사람에게 적합한 존경받을 만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확립됐다는 사실이다.

광복 이후 이 땅에 등장한 수많은 정치 지도자들 중 공공성과 도덕성에서 흠결(欠缺)이 없는 경우는 드물었다. 국민의 도덕성 평균치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국민을 이끌기는커녕 불미스러운 언동으로 오히려 걱정거리가 되곤 했다. 부박(浮薄)한 시대정신을 금으로 바꾸고 말겠노라는 ‘고상한 야심(noble ambition)’을 품은 정치 지도자를 가져보는 축복을 21세기 우리 국민도 누릴 수 있을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