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법률시장 글로벌 스탠더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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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케이스 1:주한 미 상공회의소 제프리 존스 회장의 명함을 보면 '미국 변호사'로 돼있다. 그러나 우리 법으로 그는 '변호사'가 아니다.외국법률 자문역(foreign legal consultant)일 뿐이다.

케이스 2:한국전력 구조조정실의 현금상 과장은 최근 민영화 관계로 외국 변호사에게 자문할 일이 부쩍 늘었다. 본인이 외국으로 출장 가거나, 외국 변호사를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경우가 많다. 본인이나 외국 변호사의 출장 경비도 부담스럽지만, 그보다 일처리가 늦어지는 것이 문제다. 물론 국제전화로 의논할 때도 많지만 시차 때문에 역시 불편하다.

두 경우 모두 한국에서 외국 변호사가 고객에게 직접 자문에 응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뉴라운드 협상 일정에 따라 지난 6월 말까지 미국·EU·일본·캐나다 등 10개국은 우리에게 법률 서비스 개방 요구를 해왔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어느 나라에든 개방 요구를 전혀 하지 않았다.

우리가 개방 요구를 한다는 것은 우리도 그 수준만큼은 개방을 하겠다는 것이므로, 결국 이번에 우리는 '법률 서비스 개방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세계 각국에 전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받아든 개방 요구 내용은 표에서 보듯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외국 변호사들이 매번 한국으로 출장 올 일 없이 아예 한국에 상주하면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다만 외국 법에 대한 자문에 한해.

둘째, 외국 법률회사가 단독으로 또는 한국 법률회사와 합작으로 진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셋째, 한국 변호사와 동업하거나 한국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

우리나라의 법률 시장도 이제는 세계 유수의 법률회사가 군침을 삼킬 만큼 커졌다는 얘기다.

이에 대한 우리 변호사들의 반응은 대부분 일단 부정적이다.

그래도 '외국 법 자문 허용'에 대해서는 반대가 덜한편이다.

'외국 법 자문 서비스'는 사실상 이미 풀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형식상 막아 놓고는 있지만, 우리 스스로가 아쉬워서 직접 외국 변호사의 조언을 받는 경우가 많다.

대한변협의 개방 관련 실무위원장을 맡고 있는 법무법인 태평양의 이정훈 변호사는 "법률 서비스 개방은 세계적 추세로,그 자체를 거부하는 논리는 찾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 하나 들어가면 입장이 달라진다.

외국 법률회사가 한국 법률회사와 동업하거나 한국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 소송 문화가 저질화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한국 변호사는 '공공성을 지닌 법률 전문인'으로서 '사회정의를 실현한다'는 소명의식이 있다. 그러나 외국 변호사들이 들어오면 '앰뷸런스 체이서'(교통사고나 쫓아다니는 돈독 오른 변호사)처럼 사익만을 꾀하는 변호사들이 득세할 수 있다."

한국 변호사들의 이같은 '공공성'에 일반인들이 과연 얼마나 공감하고 있을까. 또 외국 변호사들은 과연 한국 변호사들보다 공공성이 떨어질까.

이같은 문제들을 따져보기 이전에, 한국 법률회사들이 내심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다.

외국 법률회사가 한국 변호사까지 고용하게 되면 외국법에 대한 자문에 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 법 관련 자문과 소송까지 맡게 되리라는 것이다.

한국 변호사는 몇명만 이름을 걸어놓은 채, 재미 한국 변호사처럼 외국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한국인들이 대부분 포진해 한국 법에 대한 자문에 응하거나 소송대리를 해도 통제할 길이 없다는 얘기다.

또 외국 변호사·법률회사들이 들어오면 '일단 걸고 보자'는 식으로 모든 것을 소송으로 해결하려드는 '소송 천국'이 될 가능성이 크고, 그 경우 한국의 법률회사들보다 대기업·정부 등이 더 크게 시달릴 것을 각오해야 하리라는 걱정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걱정 때문에 정부의 행정편의·만능 주의가 미리 견제받고, 기업 경영의 투명성도 확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특히 급속히 진행되는 한국 경제의 세계화 추세를 수용하고 그에 맞춰 우리의 법조 관행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법률 서비스 개방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경제특구 지정을 추진하는 등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백방으로 애쓰고 있는 마당에 외국 기업들이 선호하는 단골 외국 법률회사도 당연히 우리나라에 '주재'할 필요가 있다. 이때 외국 법률회사가 외국인 투자와 관련한 자문 업무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한국 법률회사와 제휴하거나 한국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김준동 연구위원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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