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임명은 與野 합의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새 국무총리 임명을 둘러싼 정국의 표류가 계속되고 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세 번째 서리'를 임명하기 위한 인선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그런데 이를 둘러싸고 여야 간에 벌어지고 있는 법리논쟁이 구차스럽기만 하다. 한나라당은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헌법 제86조를 들어 '서리 임명은 위헌'이라면서 "우선 정부조직법 제22조에 의거한 권한대행 임명"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정부조직법 제22조가 "'권한대행' 임명은 '사고'의 경우에 국한했기 때문에 '궐위'시 '권한대행' 임명은 불가능하다"고 맞서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의 관례를 보면 이 같은 양측 주장은 부질없는, 논쟁을 위한 논쟁임이 분명하다.

1948년 건국 이래 이 나라는 도합 33명의 국무총리를 생산했다. 이 가운데 14명이 일단 '서리'로 임명됐다가 '국회 동의'를 거쳐 정식으로 국무총리 자리에 앉는 사례를 남겼다. 그런가 하면 여덟명이 '국회 동의'라는 장애물을 통과하지 못해 '서리'로 주저앉아야 했고 한명(白漢成)은 '임시서리'라는 이상한 직함으로 기록돼 있다. 유일한 한명의 '국무총리 권한대행'(申秉鉉)은 현직 국무총리(陳懿鍾)의 와병기간을 메운 것이었다. 일견, 민주당의 주장을 손들어 주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헌정사는 그 반대의 사례들도 기록하고 있다. 즉, 역대 국무총리의 과반수인 19명이 '서리'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는 '헌법상의 절차'를 밟은 것이다. 이것은 한나라당의 주장을 손들어 주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같은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법리 논쟁은 세간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공리공론일 뿐이다. 공석 중인 국무총리 자리를 메우는 문제를 놓고 전개되고 있는 정국 표류의 참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문제는 金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인 것이다. 대통령중심제냐, 내각책임제냐 하는 권력구조에 관계 없이 민주정치의 중심에는 국회가 있게 마련이다. 대통령제 아래서도 여당이 국회에서 안정과반수를 확보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야당이 원내 다수당일 때는 대통령도 야당과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때는 야당과의 타협과 양보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특히 미국정치에서 많이 본다.

그러나 金대통령은 모든 국정운영에 있어서 원내 다수당인 한나라당과의 타협을 마다하고 원외 지지세력인 민간단체(NGO)들과 일부 언론의 힘을 빌려 국회를 압박하는 강공책을 구사해 왔다. 무리한 대북정책의 강행 추진 과정에서 한때 '공동정부'의 파트너였던 자민련과 결별하는 것마저 사양하지 않았고 최근에는 소위 '홍삼(弘三) 파동'의 와중에서 그 자신이 여당인 민주당의 총재직을 내놓았을 뿐 아니라 당적마저 이탈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국회의 의석 분포는 야당인 한나라당이 1백39석, 여당( ? )인 민주당이 1백12석, 자민련이 14석, 미래연합 1석, 무소속 5석으로 돼있다. 한나라당이 과반수보다 3석을 더 갖고 있다.

金대통령이 직면하고 있는 당위의 선택은 자명하다. 지금이라도 국회의 각 정파, 특히 원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한나라당과 사전협의를 통해 여야가 합의하는 총리감을 찾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金대통령이 이같이 의회정치의 정도를 택하면 여기에 합리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엄청난 부담이 한나라당 몫이 된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국민적 신망이 있는 정계 원로 한 분을 여야 합의를 통해 국무총리로 임명함으로써 대통령선거를 비롯, 향후의 정권교체 과정을 '중립적으로 공정하게 관리하게 하는 것'이 긴요하다.

국무총리의 '궐위'가 국정에 엄청난 공백을 초래한다는 정부·여당의 주장은 역시 공연한 소리다. 그 동안의 경험률에 의한다면 이 나라 국무총리는 헌법상 그의 최대 권한인 '국무위원'과 '행정 각부의 장'에 대한 '제청권'을 사실상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헌납한 채 '대독(代讀)'과 '방탄(防彈)'으로 그 기능과 역할이 한정돼 온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차기 대통령선거를 1백여일 남겨두고 있는 시점에서 여야 합의에 의한 국무총리 임명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金대통령과 그의 정부가 입으로 강조해 마지 않는 '중립적이고 공정한 선거관리'가 한낱 구두선에 불과한 것임을 자인하게 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