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30회불패신화 現代의 좌절>(4) 정부 "건설 살리려면 정몽헌은 손떼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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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이번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이후 다시는 이런 부탁 안 드리겠습니다."

2000년 10월 29일 오후 10시30분쯤.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현 현대아산 사장)이 허겁지겁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 이연수 부행장의 방에 들어섰다. 이날 만기가 돌아온 2백60억원의 진성어음을 결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연수는 딱 잘랐다.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은 몰라도 하도급 업체에 물건 값 대신 끊어 준 진성어음은 막아줄 수 없다는 게 채권단의 원칙이라고 누차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진성어음은 현대가 알아서 해결하십시오."

김윤규를 빈손으로 돌려보낸 이연수는 즉각 김경림 행장(현 외환은행 이사회 의장)에게 보고했다.

"현대가 이번엔 1차 부도를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김경림은 이를 다시 금융감독원과 재정경제부에 알린 뒤 현대측에 정몽헌(MH) 회장을 찾아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그 때 MH는 일본에 있었다.

김경림은 밤 늦도록 정몽헌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벨은 울리지 않았다. 진념 당시 재경부 장관이 최종 지침을 내렸다.

"현대 스스로 막지 못하면 부도를 내라."

결국 현대건설은 1차 부도를 냈고 시장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현대건설의 운명은 사실상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 화살은 하나의 과녁, 곧 현대건설의 주인이 은행으로 바뀌는 '채권단의 출자전환'을 향해 곧바로 날아갔다.

재계 1위 현대그룹의 모(母)기업인 현대건설의 운명이 이처럼 꼬이기 시작한 것은 현대의 방심 탓이 컸다.

사실 2000년 3월 '왕자의 난' 이후 5월부터 자금난에 몰리기 시작한 현대건설은 5월 31일 정주영 당시 명예회장이 자구계획과 함께 발표한 '3부자 동시 퇴진' 카드로 한숨을 돌린 참이었다.

더욱이 6월 13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성사는 막후에서 정부를 도왔던 현대를 한껏 고무했다. 그러나 들뜬 분위기 탓이었을까. 현대는 50여년 그룹의 역사 중 가장 중요했던 순간을 그냥 흘려 보내고 말았다.

김경림의 회고.

"당시 현대건설은 돈이 될만한 계열사 주식이나 알짜배기 부동산이 많았다.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주식이나 부동산을 빨리 팔아서 빚을 갚았다면 자금난을 수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채권단이 아무리 채근해도 현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7월이 되자 시장 분위기는 다시 얼어붙었다. 12일 현대는 2차 자구계획을 내 놓았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2000년 7월 22일 토요일 오후.

"현대건설의 신용등급을 투기등급으로 낮춰야 합니다."

"조금만 더 지켜봅시다. 그랬다 시장이 요동치면 그 책임이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시장에선 이미 현대건설 회사채나 CP가 투기등급으로 통합니다. 더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국내 3대 신용평가회사 중 하나인 한국기업평가의 서울 여의도 본사에선 뜨거운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투자적격의 마지막 등급인 'BBB-'였던 현대건설의 신용등급을 투기등급인 'BB+'로 낮추는 안을 놓고 찬반 의견이 팽팽히 맞섰던 것이다.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으로 낮아지면 회사채나 은행빚의 만기연장이 어렵기 때문에 자금난에 몰린 회사에겐 치명적이었다.

한기평은 결국 월요일인 7월 24일 0시를 기해 보도자료도 없이 인터넷 홈페이지에만 현대건설의 투기등급 강등 사실을 고지했다. 시장충격을 우려해서였다.

그러나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현대건설을 비롯한 현대 계열사 주가는 24일 개장 직후 곧바로 하한가까지 곤두박질쳤다.

한기평의 '한 방'에 이어 정부와 채권단의 압박도 본격화했다.

8월 31일 현대차 소그룹이 계열분리로 그룹에서 떨어져 나가자 현대건설에 대한 집중 포화가 시작됐다.

익명을 요구한 청와대 관계자의 회고.

"현대차 계열분리로 현대건설의 자금난이 현대그룹 전체로 번질 우려가 없어졌다. 정부로선 현대건설을 더 세게 밀어붙일 여건이 마련된 셈이었다."

10월 18일, 현대는 다시 정주영·정몽헌 부자의 계열사 지분과 서산농장을 팔아 5천8백억원을 마련하겠다는 4차 자구계획을 발표했지만 시장은 더 이상 현대를 믿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1월 3일로 예정된 2차 기업퇴출 발표가 다가오자 현대뿐 아니라 정부도 몸이 달았다.

정부는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는 MH가 귀국하지 않으면 현대건설은 법정관리에 넣는다'는 말을 계속 언론에 흘렸다. MH가 서둘러 해법을 내놓으라는 주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10월 30일 현대건설의 1차 부도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2차 기업퇴출 발표 하루 전인 11월 2일.

정부의 엄포에 놀란 MH가 급거 귀국했다. 힐튼 호텔에 방을 잡은 MH는 김경림과 이근영을 잇따라 만났다.

오후 10시.

김경림이 이연수를 대동하고 MH의 방에 들어섰다. 김경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때 鄭회장께서 외국에 나가 있으면 곤란합니다. 회장께서 직접 전면에 나서서 현대건설 문제를 수습해야 합니다. 더 이상 구조조정에 시간을 끌면 안됩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해놓고 다시 전면에 나서면 여론이 용납을 하겠습니까?"

"평상시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입니다."

김경림이 돌아가자 곧 이근영이 들어섰다.

이근영은 채권단이 대출금을 출자전환해 현대건설을 일단 살리기로 했다는 정부의 뜻을 넌지시 전했다.

진념의 회고.

"현대건설을 살리려면 출자전환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출자전환을 하려면 대주주인 鄭씨 일가의 지분을 먼저 소각해야 했는데 鄭회장이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회사가 정상화하면 채권단 지분을 鄭회장이 우선적으로 매입할 권리를 줄 수도 있다는 뜻을 전하도록 했다."

정부는 정몽구 회장 등 鄭씨 일가에도 MH 지원을 요청했다. 이는 그간 현대측에 계열분리를 빨리 하라고 다그쳐온 정부 방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제들 외에 현대가 내 놓은 주식과 부동산을 사 줄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창구는 이번에도 이근영이었다.

11월 15일, 이근영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일식당 벤께이에서 정몽구를 만났다.

"현대건설은 선친께서 일군 현대그룹의 모회사입니다. 건설이 쓰러지면 현대가 쓰러집니다. 그간 다소 불미스런 일들이 있었지만 이대로 현대가 쓰러지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현대를 도와주시지요."

이미 이근영으로부터 몇차례 이런 주문을 받은 바 있던 정몽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튿날 정몽구는 서울 양재동 사옥으로 찾아온 MH를 만나 현대가 자구계획으로 내놓은 정주영의 계열사 지분과 부동산 2천1백60억원어치를 사주기로 했다고 발표한다. 정부도 거들었다. 토지공사를 동원해 팔리지 않는 서산농장을 대신 팔아주도록 했다.

11월 20일, 정부와 鄭씨 일가가 총동원된 현대의 5차 자구계획이 발표됐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현대건설을 떠나 있었다.

근근이 해를 넘겼지만 2001년이 되자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3월 30일과 4월 1일엔 2천여억원의 진성어음이 돌아왔다. 현대로선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공은 정부와 채권단으로 넘어 갔다.

다급해진 정부는 삼일회계법인에 현대건설의 2000년 결산작업부터 의뢰했다. 현대건설의 부실이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한창 삼일회계법인의 실사가 진행되고 있던 3월 22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3월 24일. 현대건설의 이승렬 이사가 외환은행 이연수 부행장을 찾아갔다.

"적자가 2조9천억원입니다. 자본금은 전액 잠식 상태입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적자였다. 이틀 뒤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관계부처 회의가 열렸다. 이근영과 이기호 경제수석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이근영:현대건설을 법정관리에 넣으면 충격이 너무 큽니다. 채권단이 대출금을 출자로 전환해 살리되 그 혜택이 대주주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대주주 지분은 완전히 소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기호:대우도 처리했는데 현대건설을 못할 것 없습니다. 대외신인도를 올리자면 원칙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대통령께서도 대외신인도에 가장 신경쓰고 있습니다.

이근영:건설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공사를 못 따내기 때문에 회생한 전례가 없습니다.

결론이 안나자 회의는 다음날로 이어졌다.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다시 열린 회의에서 외환은행은 현대건설을 법정관리에 넣을 경우 경제에 미칠 충격을 추산해 왔다. 규모는 최소 10조원에서 최대 28조원.

반면 현대건설을 살리는 데는 2조9천억원만 투입하면 됐다. 그것도 1조4천억원은 기존 대출금을 주식으로 전환시켜 주는 것이어서 채권단의 신규 부담은 1조5천억원에 그칠 수 있었다.

차이가 너무 컸다. 결국 이기호도 출자전환 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장관회의 후 DJ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DJ는 보고에 앞서 먼저 이근영에게 물었다.

"현대건설을 법정관리에 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근영은 장관회의에서 외환은행이 보고했던 내용을 다시 설명한 뒤 대안으로 출자전환 안이 마련돼 있다고 대답했다.

"李위원장의 설명이 맞는 것 같소. 그렇게 하시오."

3월 27일, 금감위는 현대건설에 대한 출자전환 방침을 공식 발표했고 이틀 뒤 35개 금융기관이 참석한 현대건설 채권단협의회에서 2조9천억원 규모의 '현대건설 경영정상화 방안'을 확정했다.

그러나 대주주 MH를 설득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채권단이 출자전환을 하자면 대주주가 자신의 지분을 포기한다는 동의서에 사인을 해줘야 했다.

다시 이근영이 나섰다.

3월 30일 오후 1시쯤.

하얏트 호텔 로비의 커피숍에서 이근영은 MH와 다시 마주 앉았다. 이근영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현대건설은 지금 채권단이 출자전환을 해주지 않으면 곧바로 부도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돌아가신 정주영 회장께서 일으켜 놓은 회사가 그런 식으로 쓰러지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잘 아시겠지만 출자전환을 하자면 대주주 지분을 모두 소각해야 합니다."

이근영의 설명을 묵묵히 듣기만 하던 MH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거기까지 가는군요. 알겠습니다. 방법이 없다면 할 수 없지요."

MH의 동의로 출자전환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5월 18일 주주총회에서 출자전환 안을 통과시킨 현대건설은 8월 1일 그룹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생존의 길을 걷게 된다. 현대투신에 이어 현대건설마저 MH의 손을 떠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현대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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