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 화가들과의 예술적 교류 그린 자전적 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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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소설은 과학'이라는 모토 아래 외과의사의 메스와도 같은 정확성으로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사회상과 인간 군상의 모습을 가감없이 그리려 했던 자연주의의 선구자 에밀 졸라(사진·1840~1902년).

그의 서거 1백주년을 맞아 대표작 중 하나인 『작품』(l'œuvre)이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됐다.

졸라가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大家) 발자크의 『인간 희극』의 영향을 받아 1871년부터 93년까지 20여년 간 집필한 20권짜리 『루공 마카르 총서』 중 열네번째 작품인 『작품』은 마네·세잔 등 인상파 화가들과 졸라 자신의 예술적 추구, 교류 등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루공 마카르 총서』 중 『목로주점』 『제르미날』『나나』 등이 일찌감치 소개돼 빛을 본데 비해, 『작품』은 1886년 발표된 지 1백6년 만에 국내 독자들과 만나게 됐다.

뒤늦은 번역·출간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더 빨리 소개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반응들이다. 고려대 정장진(불문학) 교수는 "졸라를 포함한 자연주의 소설가들은 진정한 역사를 남긴다는 자세로 철저한 현장 조사를 거쳐 소설 쓰기에 매달렸다. 그런 점에서 역사학자들의 영역에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며 "이제는 고전인 졸라의 남은 작품들도 하루 빨리 번역돼 전집이 출간돼야 한다"고 말했다.

미술계의 반응은 좀 더 뜨겁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아트스페이스 서울 관장)씨는 "미술사에 있어 일대 전환을 가져온 인상파, 후기 인상파를 거론할 때 졸라를 피해갈 수 없다"며 "진작 번역됐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졸라가 인상파를 적극 옹호한 이유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빛이 변하고, 그에 따라 바뀌는 풍경을 화면 위에 잡아내려고 했던 인상파 화가들의 과학적인 노력이 인간의 유전적 요인까지 소설적 고려에 넣었던 자연주의의 과학 중시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졸라는 마네를 옹호하는 살롱전 관전평을 썼고, 마네는 답례로 1868년 '청년 졸라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졸라와 인상파의 친연성은 소설 속에서도 고스란히 확인된다. 소설의 주인공인 화가 클로드 랑티에는 마네와 세잔을 적절히 뒤섞어 놓은 인물이다.

클로드의 죽마고우로 등장하는 소설가 피에르 상도즈는 다름아닌 졸라 자신이다. 졸라는 실제 고향 친구였던 세잔과의 우정, 곁에서 지켜본 마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고단한 예술적 투쟁, 좌절과 갈등을 소설 주인공 클로드가 기성 화단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끝내 자살에까지 이르는 과정 속에 생생하게 담아냈다.

자신을 모델로 한 주인공 클로드가 예술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자살로 최후를 맞는 마무리에 격분한 세잔은 졸라에게 냉담한 편지를 보냈고 이후 이들은 절연했다.

프랑스 제 2 제정시대(1852~1870년)를 시대 배경으로 한 『루공 마카르 총서』는 정신병에 걸린 아델라이드 푸크와 남편인 농부 루공, 루공이 죽고 나서 푸크가 사귀게 된 알콜 중독자 마카르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들의 일종의 가족사이자 연대기다.

인간의 운명이 경제적·사회적 환경은 물론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된다는 소설관에 따라 끝내 운명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가족사를 통해 제 2 제정시대의 모든 것을 그린다는 게 졸라의 기획 의도였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당연히 혈연 관계다. 13권 『제르미날』의 주인공 에티엥과 『작품』의 주인공 클로드는 모두 7권 『목로주점』의 여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아들들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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