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3>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17.'남기고…'를 쓰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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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이 연재가 진행되면서 요즘 내 생활엔 활력이 넘친다. 아스라한 옛날로 되돌아간 느낌도 삼삼하지만, 무엇보다 지인(知人)들과의 뜻밖의 만남이 있어 더욱 즐겁다. 기사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좋은 일도 일어나니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사조쯤은 되는 것 같다.

얼마 전 내 첫 드라마 주제곡인 '진고개 신사' 이야기가 나간 뒤 작곡가인 김호길 선생으로부터 희소식을 하나 들었다. "최희준씨 덕분에 오랜만에 라디오에 출연하게 됐어. 지금 거길 가는 길이야."

김선생과 '진고개 신사''하숙생' 이야기를 읽은 KBS 라디오의 한 음악 프로그램에서 김선생을 초청해 '그 때 그 시절'의 풍경을 들은 것이었다. 김선생은 여든세살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기억력이 또렷하고 정정한데,옛일을 회상하는 즐거움이 오죽했으랴.

잠깐 이력을 소개하면, 김선생은 옛날 5년제 선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明治)대에서 상학을 공부했다. 유학시절엔 배구선수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신촌블루스의 키보드 주자였던 김명수가 김선생의 아들로 음악 2대의 길을 걷고 있다.

나도 깜박해서 잘못 알았던 사실을 바로 잡아주는 경우도 생겼다. 얼마 전엔 서울대 1년 선배로 중앙일보 이사를 지낸 윤명중(한국언론인포럼 회장)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잘못 나간 사실을 좀 바로잡아야겠어. 그 '세계의 휴일' 쇼 말이야. 그거 1960년이 아니라 61년에 있었던 일이야."

아차 싶었다. 당시 한국일보에 이 쇼에 관한 평(評)을 실은 주인공이 바로 윤씨라니 꼼짝없이 당한 셈이다. 나도 기억력은 비상하다고 자신했는데, 요즘엔 그것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걸 계기로 윤씨와 오랜만에 만나 거나하게 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대학 시절 문리대 정치학과 학생으로 학보사 기자였던 윤씨는 '걸어다니는 음악 백과사전'으로 통했다. 미군 방송이나 레코드판을 듣고 어설프게 따라하던('흉내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내 팝송 실력을 여지없이 박살낸 게 그였다. 해당 가수와 노랫말, 그에 얽힌 뒷이야기를 빼곡하게 적은 대학노트를 나에게 물려주어 음악공부에 도움을 준 사람이다.

"내가 자네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 떠오른 게 있어. 언젠가 고별 콘서트를 근사하게 하는거야. 신곡의 노랫말은 내가 책임질게."

윤씨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지어온 노랫말 두개를 나에게 안겼다. 지금 나에게 '은퇴'같은 말은 안중에도 없지만, 이순(耳順)이 넘은 나이에도 옛날의 정리를 생각하며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선배가 고마울 따름이다.

윤씨는 한명숙과 '노란 샤쓰의 사나이', 그리고 작곡·작사가인 손석우 선생과 얽힌 비화 한가지도 기억해 냈다. 당초 손선생은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힐리빌리' 스타일로 작곡해 한씨에게도 그렇게 부르도록 요구했었다고 한다. 힐리빌리란 당시 '황야의 7인' 등 웨스턴 영화에 등장하던 빠르고 경쾌한 리듬의 음악 스타일을 이른다. '징가자 징가자 징가자…'하는 식으로 멜로디가 반복해 이어지는 게 특징이다.

그러나 이런 스타일이 한씨에겐 도무지 먹히지 않았다. 한씨는 자신의 최고 장기였던 패티 페이지 노래 스타일을 고집했다. 결국 손을 든 손선생은 '네 맘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었다. 그게 바로 빅히트를 기록한 것이다. 사실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나도 '그림자'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60년대 중반 MBC 라디오 음악부장이었던 최광민씨는 66년 열린 제1회 MBC 10대 가수상 및 최고 인기가수상 시상식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해 말 임택근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됐는데, 나는 '하숙생''종점'의 성공으로 첫 수상자가 됐다.

임씨가 "수상자 최희준"을 부르자, 나도 모르게 최종 경쟁자였던 이미자씨에게 찾아가 그녀의 손목을 꼭 잡으면서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내년엔 미자씨가 꼭 탈 겁니다." 이듬해 이씨는 실제로 이 상을 거머쥐었다.

아무튼 젊은 시절 60년대는 요즘 내 일상의 중요한 '현재'로 자리잡고 있다. 영영 잊어진 듯했던 과거가 지금 내 생활의 일부가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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