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김인숙 '숨은 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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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대학시절,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교정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도서관에만 파묻혀 있던 남자. 노모와 세 여동생의 생계를 제 한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남자. 고시를 포기하고 공기업에 취직한 후 파업의 선봉에 서서 삭발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TV에 나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남자.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반겨주지 않는 보험 외판원이 돼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다고 회상하는 남자. 제자리 멀리뛰기를 잘하는 남자. 제자리 멀리뛰기를 한 후에는 섬세하게 웃을 줄도 아는 남자. 인생의 해피엔딩을 믿는 남자. 그러나 이제 "해피엔딩으로 끝날 새로운 스토리를 쓰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남자. 살아가는 일의 누추함을 제 한몸에 끌어안고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남자.

그리고 여기, 그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 여자가 있다. 대학시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남자의 내면에 깃든 섬세함과 삶에 대한 선량한 의지를 알아본, 아마도 유일한 여자. 궁핍하고 고지식한 남자의 우람한 체격 속에 숨어 있는 아이같은 모습에 매혹된 여자. 도움닫기도 없이 제자리에서 놀랄 정도로 높이 멀리 뛰는 남자의 모습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있는 여자. 남자의 '멀리뛰기'가 "어쩌면 그의 삶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농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여자. 가끔 그 남자와의 우연한 낭만적 재회를 꿈꾸는 여자. 그러나 고속버스 안에서 비대한 몸으로 자기 옆에 앉아 하염없이 사탕을 까먹고 있던 남자와 17년 만에 재회한 여자.

김인숙의 '숨은 샘'은 이처럼 한 여자의 회상을 통해 자신의 발목을 거머쥐고 있는 삶으로부터 한번도 높이, 멀리 뛰어본 적이 없는 중년남자의 고달픈 생의 흔적을 찬찬히 더듬어나간다. 안되는 일뿐인 세월의 올가미 안에서, 가난하고 고지식한 남자가 삶에 대해 걸었던 선량한 꿈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 늘 짝이 맞지 않았다. 기를 쓰고 달려도 남들보다 언제나 한발짝씩 뒤처지는 인생의 불운. 그의 불운은 어쩌면 그가 인생의 선의(善意)를 지나치게 믿은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자신의 전부를 걸고 힘차게 뛰어보리라 꿈꾸며 도서관에서 이를 악물고 견디던 대학시절, 그 꿈을 위해 그가 파업의 선봉에 섰을 때 그가 믿은 인생의 해피엔딩이 그에게 닥쳐올 인생의 또 다른 불운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가난한 집 장남으로 태어난 남자의 고달픈 인생유전이야 사실 그리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숨은 샘'은 그 이야기를 여성 화자의 깊고 섬세한 내면의 언어로 엮어가면서 한번도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었던 적이 없는 한 평범한 남자의 누추한 세월 속에 여전히 훼손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한가닥 삶의 진실에 접근한다. 다시 만난 남자와의 불편하고 어색한 재회의 자리에서, 그가 그녀에게 보험 팸플릿을 꺼내드는 대신 예전처럼 높이 멀리 뛰지는 못해도 땅 위에 엉덩방아를 찧지 않는 멋진 착지동작으로 멀리뛰기를 해보였을 때, 그녀는 남자의 삶이 지닌 그 유일한 농담 속에서 그가 꿈꾸는 해피엔딩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인생의 해피엔딩을 꿈꾸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음을. 그 해피엔딩이 삶의 모든 누추함을 견디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뜻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박혜경<문학평론가>

<약력>

▶1963년 생

▶83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소설 『칼날과 사랑』『먼 길』『우연』 등

▶한국일보문학상·현대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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