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세계는 지금 '소프트파워' 경쟁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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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남아시아 참사로 새해 벽두부터 전 세계에 어둠이 짙게 깔렸다. 미.일.유럽은 경쟁이라도 하듯 '쓰나미' 재앙에 구호금 약정을 하고 있다. 구호금 액수를 해당 국가 국력이나 국제사회의 위상으로 연결짓는 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세계질서에서 감당하는 역할을 일정부분 반영한다는 점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 정부도 적잖은 액수를 약속했고 국제비정부기구(NGO)나 기업을 포함한 다양한 단체들이 지원과 구호활동에 나서고 있다.

우리는 이 비극과 각국의 대응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세계질서와 이에 부합하는 한국의 국가상 혹은 대외전략틀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냉전 종식과 더불어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맞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정반대로 무질서의 양상을 강하게 나타냈다. 1991년 걸프전,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2001년 9.11 테러, 2003년 이라크전쟁, 그리고 이번 '쓰나미'를 위시한 각종 자연재앙이 잇따랐다. 이 같은 무질서의 배경에는 리더십 부재, 세계적 양극화, 생태위기, 제도(특히 국가) 위기 등이 자리 잡고 있다.

70년대 초부터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면서 국제질서는 협력보다 첨예한 경쟁이 지배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전통적 국제 규범과 제도는 일방주의와 무력행사로 대체됐고 진정한 의미의 리더십이 사라졌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하면서 세계적 양극화가 심화됐고, 금융위기와 외채위기가 빈발해 양극화를 가속화시켰다. 20세기는 모든 국가가 개발지상주의를 추구한 결과 생태위기를 초래했다. 지구 도처에서 국가의 사회적 응집력이 공통적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위기가 수시로 표출돼 특정 국가나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된 세계질서 속에 국력을 결정짓는 데 있어서 소프트 파워, 즉 도덕과 문화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일본.미국.영국.인도 같은 국가들이 구호경쟁에 나선 것도 바로 소프트 파워를 통한 도덕적 우위 확보와 관련돼 있다. 향후 국제정치에서의 영향력은 누가 세계적 문제에 대해 문화적 감수성을 보여왔으며 도덕적 우위를 축적해왔는지에 상당부분 좌우될 것이다.

한국 외교틀도 바로 이런 차원에 역량을 모으도록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중견국가를 넘어 선진민주문화강국으로 도약하려면 바뀐 세계질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에 부합하는 전략틀을 세워야만 한다. 테러.자연재앙.빈곤.내전 등의 전 지구적 이슈가 발생했을 때 한국이 어떤 주도성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체계화하고 국가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근거를 갖춰야 한다.

한반도는 21세기 세계체제 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쓰나미' 같은 재앙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에는 글로벌시대.동북아시대.한반도시대가 공존하거나 교차한다. 동북아시대는 역내 평화와 공동번영의 비전으로서 세계적 흐름에 비춰 적절한 국가 구상이다. 한반도시대는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를 정착시킨 가운데 한반도 전체가 잘사는 그런 공동체 구상이다. 이런 한반도 및 동북아 구상을 펼치되 한국은 글로벌시대에 부합하는 대외전략틀을 짜야 한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내실을 다지면서도 자신의 몫을 적극적으로 담당해야 한다. 소프트 파워를 중시해 도덕과 문화의 힘을 제고시켜 선진민주문화강국의 면모를 갖춰야 한다. 아무리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 안에 들고 달러가 넘쳐도 덕을 베풀 줄 아는 국민적 소양과 국가 시스템이 없으면 선진국이 될 수 없고 국제정치에서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다. 5000억달러 시대를 열기 위해서도 문화국가의 면모와 도덕적 우위를 갖추는 것이 필수다.

이수훈 경남대 교수.국제정치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