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마종기 '길' 外:詩를 향한 운명적 유랑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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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시인 마종기의 생애는 '시인'으로서의 삶을 배반해 온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시인의 일용할 양식이자 무기인 '모국어'가 변방의 외국어가 되는 외국에 거주해왔다. 이 때, 그의 모국어와 '이민자의 시'는 그 자체로 절실한 시적 상징이 된다. 또한 의사라는 그의 직업적인 생활공간은 시적 생산의 자리로부터 먼 곳에 위치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 비시적(非詩的)인 상황들로부터 시를 길어 올린다. 그의 시들은, 시가 솟아날 수 없는 곳에서 오히려 시가 더욱 환하게 피어나는 역설의 증거다.

마종기 시의 특징으로 평가되는 투명한 순수성의 공간은 산문적인 단순성과는 구별된다.

그는 자신의 실존적 정직성을 시적 질료로 삼고 그것을 투명하게 묘사한다. 이 투명한 묘사에의 의지는, 의미의 여백과 아이러니를 머금고 있는 은유의 언어들을 낳는다.

최근 그의 시들은 순정한 시적 공간을 찾아가는 유랑자 의식이 생에 대한 추상(追想)의 시점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표랑(漂浪)의 삶에 대한 회상이 2인칭에 대한 따뜻한 호명의 화법을 실현하는 자리에 '길'이 있다.

"높고 화려했던 등대는 착각이었을까"로 시작되는 고백은 삶 전체를 바다의 길로 은유한다. 화자(話者)는 그 삶의 기원,"그 놀라운 처음의 새로움"을 기억하고 "피 흘리던 만조의 바다가 신선해"지는 장면을 불러온다. 생의 시간적 마디들은 정갈한 언어로 그려진 바다의 풍광들과 대응한다. 그러나 풍경은 삶에 관한 개념적 진술로 환원되지 않으며, 은유적인 묘사는 기억의 내면을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몰랐다./ 저기 누군가 귀를 세우고 듣는다./ 멀리까지 마중 나온 바다의 문 열리고/ 이승을 건너서, 집 없는 추위를 지나서" 라는 고백적 진술은 삶에 관한 닫힌 확신과 감상의 자리를 벗어나 있다.

화자의 고백은 표랑해 본 자만이 도달하는 삶에 대한 겸허를 보여주며, 그 겸허한 시선이 '바다의 문'을 열게 한다. 그런데 이 회상과 성찰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길 걸어가는 사람아,/ 들리느냐"라고 호명하는 행위 자체다. '길'은 같이 걸어온 사람 때문에 추억할 만한 것이 된다.

'목련, 혹은 미미한 은퇴' 역시 기억의 현상학과 고백의 화법이 만나고 있으며, 그 모든 고백들을 '당신'에게 바치고 있다.

"행방이 묘연한 내 살림살이"로 표현되는 고단한 이민의 생애는 "구름처럼 피어"있던 목련,"색깔이 엷어지"는 목련, 비오는 날의 "목련 꽃 벗은 몸"의 이미지들로 변주된다.

그 이미지들은 "죽은 꽃나무 짊어지고 산정을 향하는/ 당신 연민의 옆얼굴이 밝아오"는 성스러운 시간에 이르러서는 종교적인 차원에 이른다.

시인은 여전히 "내 집은 땅, 지상의 배,/도망가는 지상의 파도에 흔들리는/ 내 집은 위험한 고기잡이배"('내 집')라고 노래할 정도로 비극적인 유랑의식에 붙들려 있다.

그러나 이 유랑의식은 삶의 정처없음에 대한 한탄에 머물지 않는다. 시인은 표랑의 운명을 삶의 근원적인 조건으로 성찰하고, 그 안에서 보편적인 생체험의 내용을 발견한다.

그 발견은 함께 유랑하는 타자들에 대한 깊고 그윽한 시선을 동반한다. 이 성숙한 유랑자에게 표랑의 시간들을 호명하는 일과 사랑을 호명하는 일은 이제 하나다.

이광호<문학평론가>

<약력>

▶1939년 생

▶1966년 도미(渡美), 현재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근무 중.

▶5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조용한 개선(凱旋)』『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그 나라 하늘빛』『이슬의 눈』 등.

▶한국문학작가상·편운문학상·이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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