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김영희 칼럼

클린턴·게이츠의 판문점 시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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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과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가 남북 군사분계선 25m 앞에서 북한 땅을 응시한 지난 21일은 한·미동맹이 얼마나 공고한 것인지, 북한의 도발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가 상징적으로 확인된 날이다. 그들이 군사분계선 앞에 섰던 짧은 시간은 그것 자체가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강력한 대북 경고 메시지였다. 그것은 수천 번의 대북 확성기 방송이나 북한에 날아갈 수만 개의 선전 풍선보다도 훨씬 위력적이었다. 동해에서의 한·미 연합 군사훈련과 함께 그것은 북한에 보내는 입체적인 메시지였다.

클린턴과 게이츠 두 장관이 한국의 외교·국방장관과 함께 전쟁기념관 천안함 46용사의 명비(名碑) 앞에서 묵념을 하는 모습은 북한에 대해 “너희들이 한 짓이야!”라고 외치는 함성이었다. 게이츠 장관이 굳이 한·미동맹이 지금보다 강한 적은 없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한·미동맹의 표류(漂流)를 걱정하던 사람들은 이제 큰 시름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한·미동맹의 역사상 이런 날은 없었다.

클린턴 국무장관이 북한에 던진 메시지는 더 구체적이다. 클린턴 장관은 미국이 곧 북한의 지도부를 겨냥한 돈줄 차단을 포함한 추가 제재를 시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북한에 호전(好戰)적 행동을 중단하고 불가역(不可逆)적인 비핵화 조치를 취하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고 촉구했다. 그 말은 미국이 생각하는 북한의 유일한 생존의 길은 6자회담에서 합의한 비핵화 조치를 이행하고 천안함 격침과 같은 남한에 대한 도발을 중단하라는 충고요 경고다.

미국의 두 외교·안보장관이 같이 한국에 와서 나란히 군사분계선까지 방문하면서 한·미동맹의 견고함을 만천하에 과시한 것은 참으로 마음 든든한 일이다. 천안함 침몰 이후의 불안이 많이 해소된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불안하다. 미국의 외교·안보장관들이 한국에서 쏟아낸 발언과 취한 행보는 냉전(冷戰)의 극성기에 미국과 소련이 주고받던 성명과 발언들을 연상케 한다. 안보 불안이 물러난 자리에 한반도가 냉전의 최성기로 후퇴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들어앉는 것 같다. 두 나라 외교장관들은 북한이 천안함 격침(擊沈)을 사과하지 않고 비핵화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6자회담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6자회담은 남북한과 주변 4강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긴장완화와 평화를 논의하는 유일한 다자회의체다. 한·미 2+2 회담은 그 문을 쾅! 소리도 요란하게 닫아버렸다. 이른바 출구전략의 출구를 일단 봉쇄한 것이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에 중국은 염치도 없이 격앙되었다. 한국과 미국의 경고가 강하면 강할수록 북한은 고맙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국내 체제의 단속과 김정일·정은 후계체제 구축에 활용할 것이다. 북한은 적어도 9월 초 노동당대표자회 이전에는 허세(虛勢) 부리는 것 말고는 진정성을 갖고 대화 모드로 돌아서지도, 비핵화 합의 이행을 약속하지도 않을 것이다. 천안함 격침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조치는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은 유엔 안보리에서는 천안함 격침과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국내에서는 남한 해군 함정을 격침시켰다고 암시하는 영웅담을 퍼뜨리는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으니 무슨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한국과 미국은 지금은 대화 모색보다는 북한을 압박할 때라고 판단한다. 옳은 판단이다. 중국의 북한 설득도 기대할 수 없고, 북한이 미국의 경고에 면역이 생긴 현실에서 동해에서의 무력시위와 대북 경고 발언과 김정일을 구체적으로 불편하게 만들 돈줄 차단밖에 남은 길은 없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첫째 북한 압박은 전략적 목표를 가진 것이어야 하고, 둘째 물밑 접촉의 모색은 계속되어야 한다. 북한 압박의 전략적인 목적은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이다. 한·미동맹이 북한의 도발행위 억제를 위한 수단이지만 도발을 억제하면서 대화를 통한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동맹 강화의 대가로 냉전 회귀는 안 된다. 우리는 냉전의 대가가 무엇인가를 몸으로 체득하지 않았는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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