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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프렌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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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45년 9월 2일 일본의 요코하마 항. 미국의 전함 미주리호에서 맥아더가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한다. 태평양전쟁이 막을 내리는 장면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데 쏠렸다. “저 만년필은 뭐지?” 이에 ‘파커’는 푸치니가 ‘라 보엠’을 오선지에 옮길 때도,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를 집필할 때도, 맥아더가 역사적인 서명을 할 때도 자사의 만년필을 쥐고 있었다고 선전한다.

영화 ‘7년 만의 외출’은 작품성보다 한 장의 사진으로 더 유명하다.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바람에 날리는 스커트 자락을 움켜쥔 마릴린 먼로의 자태는 아슬아슬한 섹시함의 원형이다. 하지만 여성들의 관심은 달랐다. “저 구두의 브랜드는 뭐지?” 오드리 헵번의 못생긴 발을 예쁘게 감쌌다는 페라가모는 먼로를 거치며 구두의 대명사가 된다.

‘버버리’는 트렌치 코트 브랜드다. 그런데 영국의 왕 에드워드 7세가 입버릇처럼 “내 버버리를 가져오게” 하면서 보통명사화된다. 경영난에 시달리던 버버리를 살린 것은 일본의 아줌마들이라고 한다.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일본에서 소비했다는 것이다. 여기엔 우리도 일조했다. 노숙자도 두른다는 버버리 머플러를 적어도 100만 장 이상 구입하지 않았을까.

월스트리트 저널이 최근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명품에 호의적(luxury friendly)’이라고 보도했다. 한국의 명품 소비는 지난 1년간 46%나 증가했고, 고가의 명품을 구입하고 죄의식을 느낀 적이 있다는 한국인은 5%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물론 명품은 물품을 넘어 예술품이다. 실질적인 사용가치를 뛰어넘는 가치를 지녔다. 하지만 지나치게 매달리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오죽하면 노자가 도덕경에서 “재화를 귀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백성이 도둑질하지 않도록 하라(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 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고 했을까.

그럼에도 명품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최저생계비를 벌어도 너도나도 가방은 수백만원대 ‘루이뷔통’이다. 이런 ‘따라 하기’는 심리학적으로 ‘동조행동’이라 하는데, 타인의 반응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바로 ‘왕따’의 두려움 때문이란다. 한편으론 명품으로 내면의 부족함을 가리려는 것일 게다. 차라리 돈 안 드는 노력으로 몸을 명품으로 빚으면 싸구려 셔츠가, 독서로 정신을 명품으로 가꾸면 낡은 구두가 오히려 멋스럽지 않을까. 명품에 홀린 군상들에게서 천민 자본주의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우울하다.

  박종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