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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자 ~알 났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문명의 충돌』로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은 1999년 포린 어페어스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정기적으로 여러 나라들을 불량(Rogue)국가라고 규탄하지만 많은 나라들이 보기에 미국이야말로 불량 수퍼파워가 되어가고 있다."

그때의 대통령 빌 클린턴은 97년 선진국 수뇌회의에서 미국의 경제적인 성공은 다른 나라에 귀감이 된다고 자랑하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미국은 위대해서 다른 나라들보다 안목이 높다고 위세를 부렸다.

헌팅턴은 미국이 불량 수퍼파워로 보이는 사례를 여러 가지 들었다. 다른 나라들에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미국의 가치관을 따르라고 압력을 넣고, 남의 나라에서 치외법권적으로 미국의 법을 적용하고, 인권·마약·테러·대량살상무기·종교에 관한 미국의 기준에 따라서 나라의 등급을 매기고, 미국의 가치관을 안따르면 제재를 가하고….

그러나 오늘의 부시시대에 비하면 클린턴시대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같이 보인다. 헌팅턴이 지적한 클린턴시대의 미국의 불량성과 오만에 부시 정부는 독선적인 단독주의를 보태고 있다. 지구 환경에 관한 교토의정서 파기, 소련과 체결한 미사일 요격미사일 제한협정 탈퇴, 북한·이란·이라크에 대한 악의 축 딱지, 이라크 공격준비가 그것이다.

그러나 부시 정부 횡포의 극치는 국제형사재판소(ICC) 죽이기라고 하겠다. 대량학살 같은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를 재판하게 될 국제형사재판소는 98년 재판소 설치에 관한 로마협정에 서명한 나라들 중에서 60개국 이상이 협정을 비준한 지난 7월 출범했다. 한국도 서명을 마치고 연내 국회 비준이 예상된다.

오지랖 넓게 세계의 분쟁에 개입하고 있는 미국은 미국 군인들과 정책수립가들이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 국제형사재판소 죽이기에 앞장서고 있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이렇게 선언했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출범하면 미국 시민들이 그들의 헌법상 권리를 존중할 의무가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기소될 위험에 노출된다. 우리는 미국의 국민과 이익과 가치관을 지킬 것이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는 98년 영국 방문 중에 스페인 진보파 검사들의 요청에 따라 대량학살 혐의로 영국 경찰에 체포돼 스페인 당국에 넘겨질 위험에 처했었다. 미국은 예컨대 헨리 키신저 같은 미국의 지도자도 그런 봉변을 당할 수 있다고 걱정한다. 미 정부는 국제형사재판소 설치에 관한 협정에서 탈퇴하고 상원은 협정 비준을 거부했다.

미국의 입장은 독선이요 기우(杞憂)라는 것이 이 문제에 정통한 사람들의 컨센서스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인류에 대한 범죄가 발생했을 경우 가해자의 국가가 스스로 범죄행위자를 처벌하려고 하지 않을 경우에만 사법적인 정의 실현에 나서게 돼 있다. 기소하는 대상도 개인이기보다 국가와 정부다. 이것들은 미국이 압력과 협상을 통해서 얻어 낸 물타기다.

부시 정부는 왜 국제형사재판소에 적대적인가. 기독교 우파 중심의 보수진영의 압력이 가장 큰 이유다. 94년 텍사스주 공화당이 기독교 우파에 장악된 이후 부시는 그들의 이해에 맞는 정책을 펴 왔다. 그가 2000년 대선운동을 밥존스대학 연설로 시작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그 대학은 미국 보수주의의 상징이다.

기독교 우파의 철학은 부시의 그것과 일치한다. 공산주의는 악의 화신이고 종교의 자유, 특히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 같은 나라는 퇴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부시의 악의 축 발언도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대북 강경정책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견제하는 배경도 여기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미국 정부가 미국의 주권을 조금이라도 희생하는 국제협정에 서명하는데 반대한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E H 카는 유엔 같은 국제기구는 미국 같은 강대국이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형사재판소를 인정하는 나라에는 군사·경제원조를 중단하겠다는 미국의 염치없는 협박을 보면 미국의 가장 가까운 우방들까지 참여하는 이 재판소의 장래가 결코 순탄하지 않을 조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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