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빠진 사람들 │ 강남구 '수요 인문학 강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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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오전, 강남구립국제교육원 5층. 70석 강의실이 발 디딜 틈이 없다. 20여명은 아쉽지만 바로 옆 강의실에서 TV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 전송되는 강의를 들어야만 했다. 90여 명의 사람들이 아침 일찍 서둘러 이 곳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가 한수산 씨의 강의 ‘문학 여행-하나의 작품이 이루어지기까지’를 듣기위해서다.

‘먹고 살기’보다 ‘삶의 가치’ 찾자- 인문학 열풍

지난달 중순부터 네 차례 진행된 강의의 마지막 시간이었던 이 날은 한씨의 최근작 용서를 위하여의 집필 배경과 뒷이야기로 채워졌다. 앞선 강의는 한씨의 데뷔 작품인 『사월의 끝』을 비롯해 『소설 시간의 저편』『4백년의 약속』『까마귀』의 내용을 토대로 진행됐다.

부인과의 연애 스토리, 작업실 이야기, 결혼식 에피소드 등으로 시작된 강의는 책의 근간이 된 한수산 필화사건(1981년, 소설 욕망의 거리로 인해 군부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거창한 주의나 철학이 아닌, 작가의 살아 온 과정을 전하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소설 속 내용과 맞물려 전개됐다. 수강생들은 쉽고 친근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 눈과 귀를 빼앗긴 듯 강의에 집중했다. “책 내용이 온전히 내 것이 된 기분”이라고 말하는 주부 정미라(45)씨는 “강의 덕분에 한달에 책 4권을 읽었고 지식인의 삶과 철학을 머리와 가슴에 담을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했다.

홍경희(51)씨 역시 “작가의 인생 역정이 바탕이 되어야만 제대로 된 소설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힘든 창작 과정을 통해 한권의 책이 완성된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고 소감을 전했다.

강의를 마친 한씨는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는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서 “뭔가를 가르치기보다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얘기들을 쉽게 풀어내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한씨의 강의는 강남구 평생학습센터가 주관하는 ‘수요 인문학 강좌’ 중 한 과정으로 진행됐다. 지난해 5월 신설된 인문학 강좌는 문학을 비롯해 철학·종교·역사 등 다양한 인문학 장르에서 명사를 초청, 인간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배움의 즐거움을 제공하고자 기획했다. 기초적인 내용부터 깊이 있는 심화 과정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뤄 많은 사람들의 배움에 대한 열망을 채워주고 있다.

작년 한해 수강생만 2000여 명으로, 다른 강좌에 비해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각종 비윤리적인 사건·사고들이 만연한 요즘, 인간답게 살기 위한토대인 인문학을 재조명하고 기초 소양을 쌓자는 움직임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한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앞으로도 폭넓은 주제의 강좌를 계속 개설해 중·장년층 사람들에게 자아를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문학, 역사 강좌 지역 곳곳에서 개설

강남구 ‘수요 인문학 강좌’는 현재 역사학 관련 강좌가 중반을 넘어 진행 중이다. 내달 18일부터 재개되는 새 강좌는 시인 도종환 씨가 강사로 나와 시와 관련된 문학 강의를 할 예정이다.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열리며 4주간 진행한다. 강남 평생학습센터 홈페이지(www.longlearn.go.kr)에서 신청 가능하며 수강료는 없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강남구 외에도 여러 곳에서 각종 강좌들이 진행되고 있다. 송파구 평생학습센터에서는 지난 6월부터 오는 10월까지 총 16회에 걸쳐 ‘대하 소설로 배우는 인문학’ 수업이 한창이다. 

토지와혼불두 작품에 대한 작가의 세계관, 역사적 배경 등 다양한 관련 지식을 공부하고 독후감을 쓰는 순서로 진행한다. 이 강좌는 수강생 모집시 순식간에 100명이 채워져 현재 대기자 명단까지 꽉 차 있는 상태다.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구청 교육지원과에서는 새로운 인문학 강좌를 계획하고 있다.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 문화센터도 인문학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해 인문학 강좌를 강화할 생각이다. 올 초 인문학 강의를 위해 강의실을 고대 아테네 학당 형태의 계단식 강의실로 리모델링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도서관(서초동 소재)에서도 인문학 강좌를 들을 수 있다. 23일 오후 3시,조선왕을 말하다의 저자인 역사학자 이덕일 소장(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을 초청해 ‘인문학 저자와의 만남’을 마련한다. 이 소장의 세계관과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다. 참가 희망자는 도서관 홈페이지(www.nl.go.kr)에서 신청하면 된다. 60명 선착순 모집이며 무료다.

[사진설명]소설가 한수산(가운데)씨와 수강생들이 수요 인문학 강좌(문학 여행) 마지막 수업을 끝낸 후 그동안 읽고 배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하현정 기자 happyha@joongang.co.kr / 사진=김경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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