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의 敵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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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오늘날 세계 경제의 지구촌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지만 현재의 세계화가 19세기 말의 세계화에 비해 크게 앞서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약 1세기 전의 국제자본 이동은 그 당시 세계 총생산에 대한 비율로 보았을 때 오히려 오늘날의 국제자본 이동 규모보다 컸다고 한다. 미국의 산업 및 철도 건설, 남미의 대농장 투자자금 등이 주로 런던과 유럽의 자본시장에서 조달되었던 것을 상기해 볼 때 이는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간 인력의 이동도 훨씬 자유로워 유럽으로부터 미주 지역으로 대규모 이민이 있었으며 아시아 지역에서도 많은 인구의 이동이 국경을 넘어 이뤄졌다. 오늘날 우리가 국제여행에 반드시 지참해야 하는 여권이라는 것은 20세기의 발명품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이 그 당시에도 기술혁명이 세계화의 진전에 큰 몫을 하고 있었다. 자동차·비행기와 같은 신 교통수단이 발명되었고 전화기·전신기와 같은 통신수단들도 발명되었다. 이와 때가 비슷한 1896년에는 올림픽경기가 부활됐다. 당시 유럽의 베스트셀러였던 두 권의 책은 세계의 장래에 대한 낙관적 기대를 반영하는 대표적 저서라 할 수 있다. 하나는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쓴 『우주의 수수께끼(The Riddle of the Universe)』라는 책으로서 저자는 과학이 곧 전쟁을 포함하여 세계의 거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하나는 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영국의 경제학자 노먼 엔젤 경이 쓴 『위대한 환상(Great Illusion)』이라는 책으로 그는 국가간의 경제의존도가 크게 높아진 상황에서 이제 전쟁이라는 것은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손해를 줄 뿐인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곧 이어 세계는 1차세계대전, 대공황,2차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돼 통신기술의 발달과 경제통합이 자동적으로 세계평화와 복지의 증진으로 이어지리라는 기대가 얼마나 순진한 낙관론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세기 전에 팽배했던 이같은 낙관적 기대는 곧 이어 출현한 제국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고립주의에 의해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세계각국은 금융규제 강화와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서게 되었다. 경제의 발전과 복지의 증진은 단순히 기술혁명과 시장의 힘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당시를 지배하는 정신과 사상, 그리고 국가의 지도력이 뒷받침하지 못할 때 얇은 유리그릇처럼 부숴지기 쉬운 것임을 이 시대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굽이굽이에서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21세기의 세계화라는 커다란 물결을 타고 있으면서 동시에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익숙지 않은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선진경제의 문턱 가까이까지 다가왔지만 여태까지 걸어온 걸음걸이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아닌 독재와 정부 주도의 경제였다. 지금 우리가 세계화와 개방의 물결을 탔다고 해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표방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경제가 선진화하고 다수 국민의 복지가 증진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나 시장경제는 초기일수록 준칙과 질서를 제대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고 여기에 바로 국가와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있다. 질서와 규칙의 확립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회정신 없이는 민주주의나 시장경제는 목소리 크게 내는 집단과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소수의 권익을 높여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오늘날 소위 시장경제를 표방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독재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는 집단 이기주의며 이에 편승하는 정치의 포퓰리즘이다.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바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한답시고 이 포퓰리즘에 희생되었는가.

지난 수년간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해온 노사분규, 의료분업과정에서 발생했던 이해집단 간의 대립, 최근의 마늘분쟁에 대한 정부의 대처들을 보면 우리가 과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국가경제를 발전시키고 국민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한다. 우리의 식자층과 언론,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이 어떤 규율과 질서를 세워야 하고 어떤 압력에 맞서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분별력과 이에 대한 실천적 의지를 갖지 못하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표방이 자동적으로 부강하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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