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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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치가 아무리 혼란하고 타락해도 요즘 같은 때는 없었을 것이다. 국민은 정치 때문에 갈피를 못잡고 있다. 병풍(兵風)을 떠벌리는 얘기를 들어도 누가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신당 창당을 외쳐도 그것이 바른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신문을 봐도 양쪽의 주장만 난무할 뿐 진실은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쌓이는 것은 미움과 불신뿐이다. 이런 식으로 몇개월 더 끌어 선거를 치른다면 새 정부가 된들 그 앞날은 뻔하다. 그렇게 미움이 깊어졌는데 누가 이기더라도 왜 보복을 하지 않겠는가.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준비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우리는 이미 빠져 버린 것이다.

DJ 집권 5년에 공(功)과 과(過)가 있다. 공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환란(換亂)극복과 남북화해를 꼽는다.

내가 그의 잘못을 꼽는다면 가장 큰 것이 이 나라를 미움의 덩어리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가 집권한 뒤 남남갈등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그가 집권한 후 오늘만큼 지역갈등이 깊어진 적이 없다. 오늘만큼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갈라놓는 계층 갈등이 첨예화된 적이 없다. 밉든 곱든 우리를 위해 수만명의 목숨을 희생한, 명색이 우방이라는 미국을 이 시절만큼 증오하도록 방관한 정권이 없었다. 하다 못해 언론계만 해도 방송 대 신문, 큰 신문 대 작은 신문, 보수언론 대 진보언론 식으로 이렇게 철저하게 갈기갈기 갈라놓고 서로 으르렁거리게 만든 시절이 없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어느 시절, 어느 사회든 사람의 마음에는 누구나 조금씩 미움과 원망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기도 하고 차별을 하기도 한다. 이는 각 개인의 감정의 문제이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쌓인 역사의 유산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미움이 모든 사회에서 문제화되는 것은 아니다. 인종차별이라는 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어느 사회에나 있을 수 있는 사회적 병리현상이다. 그러나 다른 인종에 대한 미움이 권력과 연관될 때 엄청난 비극을 낳는다. 유럽에서는 중세시절부터 반 유대인 감정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유대인에 대한 이 미움을 히틀러가 권력에 연결했을때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문명화된 나라, 양식(識)을 지키는 나라에서는 이러한 감춰진 미움이 정치로 표출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절제한다.

이 정권이 가장 잘못한 일은 우리 가슴 속에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이러한 숨은 미움을 권력과 연결시켜 이용한 것이다. "지역차별의 서러움을 없애겠다""못 가진 자도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좋은 생각을 상대에 대한 미움으로 전환시켜 이를 통해 집권하고, 이를 확대해 권력을 유지해 온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나라는, 이 국민의 심성은 황폐해진 것이다. 병풍이다, 5대의혹 사건이다 하며 밑도 끝도 없는 일을 갖고 지금 벌이는 이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금 불신과 미움을 증폭시켜 정권을 다시 잡아보자는 것이다. 한나라당·민주당을 지지하고 안하고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설령 정권이 재창출된들 우리나라는, 이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악은 악을 낳고 선을 선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종교의 얘기만이 아니다.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적국이었던 독일의 부흥을 위해 마셜플랜을 만들었다. 일본의 전후 복구를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적을 용서하고 더불어 살아야겠다는 미국의 그러한 관대함이 없었다면 독일과 일본이 공산화되는 등 전후의 세계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왜 DJ는 북쪽에는 이러한 관용을 베풀자고 하면서 우리 내부에서는 갈등을 증폭시키는가. 지금 이 시점 DJ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이 나라를 분열시키지 않는 것이다. 선거에 이기든 지든 더 이상 국민을 갈라 놓지 말아야 한다. 보복과 재보복의 악순환의 연속이라면 정권교체를 수백번 한들 무슨 소용인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정권을 다시 창출해야 살아 남는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대통령을 위해서, 자기 지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DJ는 5년 전 여야간 정권교체를 역사적인 사건으로 치부했다. 지금 그때처럼 여야간 정권교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인정이 우리 정치를 극한대결의 악순환 고리에서 끊어주는 것이다. DJ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바로 이 점을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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