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첸戰 승리 이끈 푸틴 신흥재벌과 또 다른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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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러시아 출판계의 최고 인기상품은 다름 아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다. 지난달 30일 들렀던 상트 페테르부르크 중심가 네프스키 대로변의 한 대형 서점은 손님의 발길이 붐비는 목좋은 곳에 푸틴 대통령 관련도서 10여종을 따로 전시한 특별 코너를 마련해 두고 있다.

그 가운데 최근의 화제작은 푸틴을 체첸 반군 사령관과 일대일로 사생결단의 결투를 벌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영웅으로 묘사한 실명소설 『대통령』이다. 체첸 전쟁을 주도하며 보여준 푸틴의 결단력을 러시아인들이 높이 사고 있음을 이 책에서도 읽을 수 있다.

푸틴은 체첸전 외에도 또 하나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취임 이후 2년여동안 계속 중인 '올리가르흐'와의 전쟁이 그것이다.

전임자인 보리스 옐친 정권 시절 등장한 금융·에너지 분야의 신흥재벌을 뜻하는 올리가르흐는 자본주의의 걸음마를 갓 시작한 러시아 경제는 물론 금력(力)을 배경으로 정치와 언론까지 주물렀다. 정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선 이들과의 한판 승부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취임 초기 푸틴은 올리가르흐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석유·언론재벌로 국가안보회의 서기까지 역임한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와 금융·미디어 재벌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를 탈세와 부패혐의로 축출했다.

하지만 최근엔 공격의 날이 많이 무뎌진 모습이다.

지난 2일 일간 가제타는 푸틴이 임명한 국영가스회사 가즈프롬과 계열 석유화학회사인 시부르의 새 경영진이 전 임원들에게 제기했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철회됐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옐친 전 정권의 자금줄이었던 이들을 계속 몰아붙이다가는 후계자인 푸틴도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주춤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안드레이 피온트코프스키 모스크바 전략연구소장은 "푸틴 취임 이전에 이미 단단히 뿌리를 내린 올리가르흐들이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며 "그런 현상은 지방으로 갈수록 심해진다"고 진단했다.

다음달 치러질 크라스노야르스크 주지사 선거는 아예 "올리가르흐들의 자원 쟁탈전"으로 불리고 있다. 이 지역의 알루미늄·니켈광산과 유전에 얽힌 이권을 노리고 광산업체 사장과 석유그룹 간부가 출마해 서로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유전이 있는 시베리아의 북동쪽 끝인 추호트카주의 주지사는 석유회사 시프네프티의 최고경영자인 라만 아브라모비치가 겸직하고 있다.

올리가르흐가 바람막이가 돼 주다 보니 기업들의 비리도 만연해 있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트란시브 가제타의 우므노프 이고르 기자는 "광산회사 관리들이 주정부 자산인 채굴장비와 기계들을 빼돌려 중국에 팔아먹는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푸틴 대통령이야말로 진짜 올리가르흐"란 비판도 나오기 시작했다. 민간연구기관 파노라마의 블라디미르 프리빌로프스키는 "푸틴과 동향인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이 크렘린과 연방정부의 요직을 독점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며 이른바 '페테르부르크 마피아'의 출현을 비판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정효식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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