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에 창작 둥지 튼 미국인 화가 윈저 조 이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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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열리는 굵직한 미술행사에 가면 눈길을 끄는 노신사가 있다. 은발을 날리며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는 그의 이름은 윈저 조 이니스(73·사진). 2년 전 서귀포에 둥지를 튼 그는 미국 출신의 화가 겸 예술이론가이자 저널리스트다. 세계를 떠돌던 방랑자였던 그는 이 섬에 이방인으로 도착했다가 곧 사랑에 빠졌다.

“제주도는 신비의 섬이죠. 삶의 위대함을 일깨워주는 순간에 튀기는 예술의 불꽃처럼, 날 사로잡았습니다. 순수에 대한 열정으로 가슴앓이를 해온 낭만주의자가 진정 쉴 곳을 찾았다고나 할까요. 제주 여성들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에 눈멀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이니스는 미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주립대를 졸업한 뒤 ‘웨스트코스트’ 신문사에서 정치부 기자, 편집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가 어린 시절부터의 꿈인 화가의 길로 나섰다. 터키·멕시코·포르투칼·일본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빛과 색의 관계를 연구했고 미술책을 썼다. 『이름난 화가가 되고도 그림을 그리는 법』『이국의 순수-코아테펙 소녀들』을 비롯해 그가 쓴 책들은 비평계에도 반향을 일으켜 주요 신문의 서평란에서 주목받았다.

“최근 20~30년 사이에 예술은 너무 많이 변했어요. 시각예술은 이제 단지 높은 가격 때문에 걸작으로 치부되고 있어요.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수집가들은 수표책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죠. 그것이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고급 예술’이라는 문화로 가는 티켓이라나요.”

이니스는 이런 현실에 실망하고 난 뒤 도착한 서귀포에서 그가 오래 그리워한 ‘예술의 순수’를 기를 수 있는 토양을 발견했다. 그 순결한 영혼을 찬양한 책이 『윈저와 신비의 섬』(형설 라이프 펴냄)이다. 이니스는 제주를 자연이 선물한 진선미(眞善美)의 공간이라고 봤다. 그는 “눈에 잘 띄지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제주에는 무척 재미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 섬에 대단한 이야기꾼들이 살고 있다고 본 그는 그 유령들을 불러내 그들의 음성을 듣기 위해 좀 더 집중해서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자고 권한다.

이니스는 자신에게 순수의 혼을 선사한 서귀포에 박물관을 세울 꿈에 부풀어있다. 그동안 그려둔 수백 점 작품으로 전시도 하고, 순수예술에 평생을 바칠 예술가들을 키워낼 교육시설도 세울 계획이다. 올 가을에는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특강을 할 예정이고 전시회도 준비 중이다.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아준 이니스에게 우근민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최근 ‘국제적인 예술가이자 작가인 윈저 조 이니스가 제주도를 자신의 거처로 선택한 것에 대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이렇게 마법 같은 영감이 깃든 제주를 발견하게 해준 이는 누구일까. 이니스는 “나의 영원한 여인상, 한국 여성, 한국 소녀”라고 표현했다. 늘 그의 곁을 지키는 수지 리, 그의 부인이다. 『윈저와 신비의 섬』에 등장하는 소녀 ‘노래’의 모델이 수지 리가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말없이 미소지었다.

정재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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