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동백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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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산기슭에 널려 있는 굵은 바윗돌 틈에 노란 동백꽃이 소보록허니 깔리었다. 그 틈에 끼어 앉아서 점순이가 청승맞게스리 호들기를 불고 있는 것이다."('동백꽃' 중에서)

노란 동백꽃 ? 동백꽃은 남해 바다를 끼고 살았던 청마(靑馬) 유치환(致環)이 '청춘의 이 피꽃'이라 불렀던 핏빛, 선홍색이 아닌가. 그러나 김유정(金裕貞·1908~37)의 동백꽃은 노랗다. 강원도 사투리로 '동박꽃'은 생강나무인 탓이다. 생강나무는 잘린 가지에서 생강 냄새가 나서 붙은 이름인데, 실제로는 어린 싹을 따 차()로 마시는 녹나무과 활엽수다. 잎이 나기도 전인 초봄에 노란 꽃잎이 옹기종기 모여 피기에 화려하고 향기가 멀리 간다.'소보록허(하)다'는 '약간 소복하게 쌓였다'는 뜻이며, '호들기'는 물오른 버들가지를 비틀어 뽑은 통껍질 풀피리다.

요절했지만 김유정은 토박이 우리말의 달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국문학도 임무출(茂出)씨가 『김유정 어휘사전』이란 책을 냈을 정도다. 사전에는 모두 8천2백99개의 표제어가 실렸는데, 그 가운데 6천8백95개(83%)가 토박이말이다. 주요 국어사전에 실리지 않은 단어만도 3천1백8개(38%)나 된다고 한다.

김유정이 구사한 토박이말은 대부분 고향 강원도 춘천과 어려서 자란 서울의 30년대 어휘다. 그가 태어날 당시만 해도 집안이 부유해 고향(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에 본가가 있고, 서울 진골(종로구 운니동)엔 아이들 유학용 집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조실부모하고 형이 재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생활이 어려워지고, 어린 나이에 실연까지 당한 김유정은 22세 되던 해 낙향했다. 그가 고향에 세운 야학이 금병의숙(錦屛義塾)이고, 여기서 폐결핵을 안고 본격적인 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동백꽃이 한창 떨어지던 37년 3월 세상을 떴다.

최근 김유정이 세간의 이목을 다시 모은 것은 94년 3월, 문화부가 선정하는 '이 달의 문화인물'로 지명되면서부터. 고향에 동상(춘천문화예술회관)과 문학비(춘천조각공원)가 선 것도 그 무렵이다. 그 때부터 얘기되던 '김유정 문학촌'(실레마을)이 6일 문을 열었다. 고향 마을을 감싼 비단병풍 같은 금병산(錦屛山)엔 동백을 잔뜩 심을 예정이다. 요절한 천재의 다음 기일엔 노란 꽃이 만발하겠다.

오병상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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