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의 노동'이여 수고했다 이젠 놀이가 일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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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우선 해커(Hacker)라는 용어를 제대로 알아두자. 해커는 날고 기는 컴퓨터 실력을 무기로 주요 전산망들의 철통같은 보안 시스템을 무력화하는 악당같은 존재가 결코 아니다. 철학박사 출신으로 현직 핀란드 헬싱키 대학 교수인 저자는 컴퓨터 특수용어들을 풀이해 놓은 간이사전 『자곤 파일』에 실린 이상적인 해커의 정의(定義)를 제시한다. '열정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정보 공유가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 또한 무료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정보와 컴퓨터 자료에 대한 접근을 최대한 용이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전문 기술을 공유하는 것이 의무라고 믿는 사람들'이 바로 해커다. 바이러스를 만들어 정보 시스템에 침투하는 파괴적인 이용자들은 크래커(Cracker)라고 부른다. 언론의 오용에서 오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해커들 스스로 1985년에 만든 용어다. 이쯤 되면 예술가 수준의 솜씨를 갖춘 수공업자를 상찬하는 장인(匠人)이라는 용어와 해커를 연결하는 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인 해커에는 신간의 공동 저자이자 1991년 리눅스라는 컴퓨터 운영체제를 개발, 무료로 보급해 전세계적인 관심을 끈 리누스 토발즈(사진(上))도 포함된다.

해커에 대한 심상치 않은 칭찬으로 시작하는 신간은 투입과 산출, 능률만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비인간화를 부른 주범으로 뜻밖에도 자본주의 발전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를 지목한다. 대안으로 제시되는 게 해커들의 생활방식과 노동윤리, 즉 해커윤리다.

알몸으로 말을 타거나(샌디 러너) 텁수룩한 턱수염과 긴머리를 늘어뜨리고는 컴퓨터 모임에 참석하는가 하면(리처드 스톨먼) 로마 원로원 또는 17세기 기사의 복장으로 거리를 활보하는(에릭 레이먼드) 등 기행을 서슴지 않는 엉뚱한 사람들. 새벽까지 골방에 처박혀 뭔가 꿍꿍이 수작을 벌이다가 오후나 돼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들에게서 무슨 대단한 윤리를 배울 게 있을까. 히피들의 생활로 돌아가기라도 하자는 것일까.

'해커를 닮자'는 자칫 오해를 살 만한 저자들의 주장은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부작용을 하나 둘씩 짚어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실체가 드러난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5년)에서 제시한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에서는 노동 자체가 목적이고 의무이다. 저자에 따르면 베버의 주장은 "노동은 그 자체로 목적, 즉 소명처럼 수행되어야"하고 "최고의 선은 최대한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다.

문제는 현대 네트워크 사회에서 노동과 돈 사이의 균형이 허물어져 중심축이 돈 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다는 점이다. 비즈니스나 노동에 의한 이익 산출보다는 자본 자체의 증식, 즉 주식가치 상승으로 대표되는 성장이 더 각광을 받게 되고 상표·저작권 등 소유권의 개념은 정보영역에까지 확장·강화된다.

동 최적화, 시간 최적화에 대한 압력은 일요일 여가시간의 유쾌함까지 빼앗아 갔다. 사람들은 쉬는 날마저 노동에 도움이 되는 기술훈련을 받거나 최상의 상태로 노동을 지속하기 위해 가능한 한 자기 자신과 노동을 분리한다.

최적화는 가정생활에도 도입된다. 어머니의 역할은 조리·세탁·육아 등을 책임지는 전통적인 것에서 이들을 외부 조달하는 일종의 관리역으로 바뀌고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는 현실을 벌충하려는 바람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한 '질높은 시간'을 보내려고 골몰한다.

저자들이 구구절절이 풀어놓는 네트워크 사회의 비인간적인 현실은 암울하기까지 하다. 가볍게 스쳐 넘기기엔 뒤가 찜찜한 이유는 이것이 다름아닌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저자들이 내놓은 것은 금요일을 일요일화하는 해커들의 삶이다. 해커들에게 노동은 더 이상 삶의 중심이 아니며 장시간에 걸친 점심식사, 저녁 술약속을 즐기는가 하면 업무와는 상관없는 엉뚱한 일에 하루 종일 매달리기로 하는 즉흥적인 결정을 수시로 내린다.

그래서는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들을까 걱정된다면 그만큼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에 젖어 있다는 증거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규칙적인 생활에 '얽매여서는' 흥미로운 일을 창조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7가지로 정리해 제시하는 해커윤리에는 바람직스러운 해커상(像)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해커들은 마치 오락을 하듯 흥미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일하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다. 정보 공유가 바람직하다는 믿음에 따라 자신만의 노하우를 서슴없이 '공개'하고 그 과정에서 해커 공동체 등 동료집단들의 '인정'을 받는다.

프라이버시와 언론 자유를 지키기 위한 행동강령을 발표하는 등 '활동적'이고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배려'도 잊지 않는다. 이런 바탕 위에서 '창조성'이 꽃핀다.

저자들은 모든 해커가 7가지 원칙에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밝힌다. 또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가 부작용을 양산하고 있지만 당장 용도폐기할 수도 없다. 해커윤리는 하나의 돌파구로서, 안(案)으로서 제시됐다.

궁극적으로는 노는 일요일도, 일에 매인 금요일도 아닌 창조성이 강조되는 중용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게 신간의 결론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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