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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진규 '배롱나무 꽃'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어머니 무덤을 천묘하였다 살 들어낸 어머니의 뼈를 처음 보았다 송구스러워 무덤 곁에 심었던 배롱나무 한 그루 지금 꽃들이 한창이다 붉은 떼울음, 꽃을 빼고 나면 배롱나무는 골격(骨格)만 남는다 촉루(??)라고 금방 쓸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다 너무 단단하게 말랐다 흰뼈들 힘에 부쳐 톡톡 불거졌다 꽃으로 저승을 한껏 내 보인다 한창 울고 있다 어머니, 몇 만리를 그렇게 맨발로 걸어 오셨다

<'배롱나무 꽃' 전문>

이 시를 끝까지 읽고 나면, 마음 속에는 한 장의 빛 바랜 사진이 남겨진다. 가슴 언저리에 깊게 골을 파고 작은 실개천이 흐른다. 좋은 시를 읽는다는 건 이런 것이 아닐까. 잘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마음 속에 남기는 것, 가슴을 치면서 '통통' 경쾌한 소리로, 혹은 격류로 흐르는 감정의 물살에 몸을 맡기는 것.

정진규씨의 시에는 이렇듯 인상적인 풍경화와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물소리'가 모두 들어 있다. 아주 느린 침착함으로 정씨는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스케치한다. 그는 "모든 사물들을 실물크기로 그리고 싶다 내 사랑은 언제나 그게 아니 된다"('자정향(紫丁香)'중)라고 고백하지만, 그가 담담하고 침착한 스케치의 달인(達人)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가 오랫동안 산문시를 고집스럽게 추구해 온 점도 이를 잘 나타낸다.

검은 색 바탕의 빛 바랜 영상 안에 배롱나무 꽃의 붉은 색채가 선명하게 두드러지고 흰뼈들의 기괴한 '빛남'이 독자들을 기이한 느낌의 세계로 끌고 가는 동안, 그가 스케치한 풍경은 어느덧 이승과 저승에 각각 떨어져 있는 모자(母子)의 교감이라는 주제로 이동해 간다.

어머니의 흰뼈와 배롱나무의 골격을 통해서 시인이 보는 것은, 단단하게 마른 인내, 그리고 죽어서도 저승에서 몇 만리를 맨발로 걸어오는 사랑이다.

어머니의 무덤 옆에 심어 놓은 대롱나무는 그 점에서 어머니의 '인고(忍苦)'를 그대로 닮아 있다. 배롱나무의 흰뼈와 붉은 떼울음이 선명하게 대조되듯이, 어머니는 단단한 인고와 함께 절정에 이른 붉은 꽃의 아름다움을 닮은 '사랑'을 동시에 지닌 존재다.

무덤을 옮기면서 "살들어낸 어머니의 뼈"를 처음 본 시인이 송구스러웠던 까닭은, 그 흰뼈가 함축하는 '아픔과 인내'의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진규씨가 그려낸 풍경은 한 마디로 그의 '마음의 궤적'이다. 어머니의 뼈에서 인고와 눈물 젖은 사랑을 추억하듯이, 그는 '고요한 옹이'라는 작품에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승과의 결별을 준비하면서 보여주는 내면의 '고요'를 묘사한다. "그걸로 이승의 길을 막으시겠단다 마지막 힘이시란다 더는 당신을 따라오지 말라 하신다 나를 등돌려 세우는 옹이로 오늘도 고요하시다 내겐, 고요가 제일 아프다"

고요란 다른 한편으론 시간의 흔적을 머금은 '아픔'의 표현임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고요와 침묵 속에서 '옹이', 즉 아픔의 흔적을 발견하는 시인은 이 세계의 적요 속에서 삶의 의미와 방식을 다시 묻는다. 연민과 애수를 애써 감추려고 하지만, 그래서 그의 시에는 어딘지 모를 서글픔과 아픈 고요가 배어 있다. 그 아픈 고요가 그의 시에 강한 긴장과 탄력을 주고, 또 매력을 발산하게 하는 것이다.

정진규 시인은…

▶1939년 경기도 안성 출생

▶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마른 수수깡의 평화』『몸시』『알시』 등

▶한국시인협회상·월탄문학상·현대시학작품상 등 수상

김춘식<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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