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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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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70년대 중반의 어느 해 여름 나는 부산 남부민동(南富民洞)의 우리 집과 광복동 부근의 학원가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못마땅하면서도 전망 없는 재수생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저만치 산복도로가 올려다보이는 천마산 발치에 있었는데, 매일 나는 그곳과 광복동 학원가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했다. 아침 일찍 집 앞 긴 골목을 따라 버스 정류장이 있는 큰길로 걸어내려가 거기서 시내버스로 학원에 이른 뒤에는 하루 종일 입시준비를 한답시고 학원과 독서실 부근을 어슬렁거리다가 밤늦게야 돌아오는 식이었다. 당연히 부모님이 아시는 내 일과표는 오후까지 학원에서 대입 종합반 강의를 듣고, 나머지 시간은 근처의 조용한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짜여 있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나는 독서실에 배정된 시간 대부분을 영화 두 편을 잇따라 보여주는 삼류극장이나 그 무렵 몇 개 생겨나기 시작한 지방극단의 꾀죄죄한 무대를 찾아다니는 일로 탕진하고 있었으니 어슬렁거렸다는 게 반드시 스스로를 비아냥거리는 말만은 아닐 것이다.

그때 우리 집에서 버스 정류장이 있는 큰길까지의 골목은 걸어서 십 분 정도 거리였는데, 좀 별난 형태로 삼등분되어 있었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첫 번째로 지나야 하는 골목길은 리어카도 지나기 힘들 만큼 좁았다. 그러나 몇 분 걷지 않아 그 골목길은 산비탈 다른 곳에서 출발한 비슷한 골목 둘과 만나 겨우 승용차가 편도로 진입할 수 있을 만큼 넓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몇 분을 더 내려가면 이번에는 또 그 비슷한 너비의 골목 둘을 만나 승용차 두 대가 자유롭게 마주쳐 갈 수 있는 제법 번듯한 이면도로가 된다. 그 이면도로로 다시 나머지 몇 분을 걸어 내려가면 이번에는 버스 정류장이 멀지 않은 왕복 4차선 도로와 만난다.

그런데 그 두 번째 골목 끝 넓지 않은 공터 가에 있는 집 한 채가 언제부터인가 아침마다 그 앞을 지나는 내 주의를 끌었다. 그 부근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60년대식 문화가옥 같은 집으로 정면에서 눈에 띄는 것만 붉은 벽돌을 무슨 귀한 장식처럼 덧씌운 시멘트 블록 집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담장에까지는 충분한 여유가 돌지 않았는지, 담장은 그저 외겹 블록으로 키 큰 어른의 어깨 높이 정도로 쌓은 뒤 그 위에 가시철망을 두어 줄 어설프게 돌려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문께에 이르면 갑자기 굵은 기둥을 세운 뒤 요란한 원색으로 도색한 철판대문을 달아 붉은 벽돌을 덮은 현관 기둥과 어울리도록 하려고 애를 썼다. 겨우 전쟁의 참화를 털고 약간의 여유를 찾아 내 집 마련에 나선 사람들을 겨냥한 도시 부동산 업자들의 초기 상품이라 상상하면 대강 짐작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집이 내 주의를 끈 것은 그 주변에서도 눈길만 돌리면 흔하게 찾아볼 수 있을 그런 외양이 아니라 그 집의 구성원들이었다. 언젠가 그 집에서 나오는 젊은 서양 여자와 역시 서양인의 외모를 한 어린 자매를 본 뒤로 그 집을 지나칠 때면 나는 자신도 모르게 집 주변을 힐금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때만 해도 부산거리에서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외양만 보고 그 주변까지 힐금거리며 살필 만큼 서양인이 드물지 않았지만, 그들의 주거지는 대개 어떤 특정한 곳에 제한되어 있었다. 미군부대 안의 사택이나 이런저런 이름이 붙은 외국인 집단거주지가 그랬다. 그런데 내가 살던 동네는 ‘남쪽 부자들 마을(南富民洞)’이라 해서 이름은 그럴듯해도 외국인이 아무 경계 없이 끼어들어 살 만한 곳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내가 유심히 살필수록 그 집안에 사는 가족들의 구성도 유별났다. 가끔씩 미군이나 서양인 남녀가 그 집을 찾고, 한국인 남녀도 자주 찾아와 어울리는 것 같았으나, 그 집 식구로서 남자는 키가 큰 한국인과 초등학교 상급반으로 보이는 사내아이뿐인 듯했다. 그리고 그들 말고 그 집에 상주하는 사람으로는 중년의 아주머니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 키 큰 남자의 아내나 그 사내아이의 어머니로는 아무래도 너무 나이 들고 지쳐 보였다.

매일같이 그 집 앞을 지나며 흘금거린 탓인지 나는 그 봄이 다 가기 전에 그 집 구성원을 훤히 꿰게 되었다. 곧 처음 내 눈길을 끌었던 젊은 서양 여자와 키 큰 한국 남자가 부부이고 금발 머리 자매와 한국인 얼굴의 소년은 친남매 간이었다. 더구나 그 집 앞 공터 모퉁이의 구멍가게 아줌마는 거기서 청량음료를 마시면서 마주 보이는 그 집의 식구들을 궁금히 여기는 내게 그들에 대한 제법 깊이 있는 정보까지 더해 주었다. 곧 내가 그 집 안주인으로 본 서양 여자는 미국 사람으로 서면 쪽에 있는 미군부대의 외국인 학교 교사이며, 그 남편 되는 한국 남자도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 그때 한창 해외진출에 열을 올리던 어떤 지역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는 귀띔이었다.

그때만 해도 외국 남자와 결혼해 사는 한국 여자 얘기는 이미 그리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러나 외국 여자, 특히 미국 여자와 결혼해 사는 한국 남자 이야기는 아직도 들으면 이것저것 되물어 보고 싶은 게 있을 만큼 흔치 않는 경우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뒤로도 공터를 가로지르며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여전히 흘금거리며 쳐다보는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방학에 접어들면서는 아예 그 공터에 있는 나무그늘 아래 멈춰 서서 그 집과 그 구성원들을 살피기까지 했다. 특히 그 공터에 나와 한국 아이들 틈에 섞여 노는 금발머리 아이들을 보게 될 때가 그랬다.

처음 내가 한국인만의 동네에서 한국인 틈에 끼여 사는 그들을 보며 떠올린 말은 소외나 고립같이 결코 밝지 않은 주변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집 아이들이 동네 한국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보면서 나는 곧 그게 지나친 선입견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엇 때문인가 한국인의 외양을 물려받은 남자아이는 오히려 공터에 나와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볼 수 없었지만, 금발머리를 한 두 여자 아이는 자주 그 공터에 나와 동네 여자아이들과 어울렸다. 특히 둘 중에 언니로 보이는, 키는 껑충해도 나이는 초등학교 중급반쯤 되는 여자아이는 자신의 남과 다른 외양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방학이 시작되고부터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그 공터 부근에서 동네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놀이에 열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조차 동네에서 그 아이들과 함께 다닌 듯 그 금발머리 아이가 진한 부산 사투리를 쓰며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패를 지어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몇 그루 안 되는 플라타너스 그늘에 다리 편히 퍼질러 앉아 공기를 노는 걸 보면 문득 진기한 광경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그 바람에 그런 그 아이를 보면 나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한참씩이나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떤 때는 너무 골똘히 바라보다 거기서 노는 아이들이나 지나가는 어른들의 수상쩍어하는 눈길을 받고서야 무안해 하며 갈 길을 재촉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방학도 다해가는 어느 오후 나는 무엇 때문인가 학원에서 조퇴를 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다시 그 공터를 지나게 되었다. 짙게 낀 먹구름 아래 비바람까지 서늘하게 불어와서인지 공터가 비어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아이네 집 모퉁이를 돌다 보니 그날도 그 아이는 동네 아이 몇과 놀고 있었다. 나는 무슨 습관처럼 여남은 발자국 떨어진 플라타너스 곁에 걸음을 멈추고 마치 몸을 숨기기나 하듯 굵은 등치에 기대 그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았다.

그날 놀이는 어찌된 셈인지 그 또래에게는 좀 때늦어 보이는 소꿉놀이였다. 그 아이가 들고 나온 듯한 인형들이나 제법 개집만 한 모형 집, 그리고 거기 딸려 있는 듯한 몇 개의 모형 가구들은 낯설었으나, 아버지 어머니를 정하고 사기나 부스러진 붉은 벽돌 따위를 곱게 빻아 그릇에 담고 식품처럼 차려놓은 것은 옛날 우리들의 그 소꿉놀이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내가 바라본 지 몇 분 지나기도 전에 그 아이들 사이에서 작은 시비가 일었다. 동네 여자아이 하나가 갑자기 그 아이에게 강하게 불평을 했다.

“가시나, 니가 또 엄마 하나? 니는 우째 좋은 거는 만날 니가 다하노?”

그러자 함께 놀던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그 아이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맞다. 집하고 밥상하고 그릇까지 저그 집에서 가지고 왔다 카지마는 우째 그카노?”

“가시나 저거, 우리 엄마 말마따나 참말로 종자가 달라 그런 거 아이가?”

그러더니 금세 한 덩이가 되어 그 아이를 둘러서서 뭇매라도 놓을 듯 노려보며 그 나이의 계집아이들 같지 않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울 아부지 말이 양놈들은 모두 심보에 꺼먼 털이 났다 카디 참말인가베. 저 가시나가 바로 안 글나?”

“야, 이 미국 년아, 다시 니하고 노는가 봐라. 니하고 놀믄 성을 갈지!”

“이 코쟁이 가시나야, 인자 고마, 너 나라 돌아 가거라이. 가서 다시는 오지 마래이.”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내 이해력으로는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급격한 사태의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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