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일부라도 찾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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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의 일부라도 찾았으면 원(怨)이 없겠습니더."

태국의 푸껫에 신혼 여행을 왔다가 실종된 조상욱(28.회사원)씨의 어머니 여연회씨.그는 새해 첫날인 1일에도 아들이 투숙했던 푸껫의 카오락 리조트 단지에서 119구조대원들의 시신 발굴 작업을 초조히 지켜봤다.섭씨 30도의 뙤약볕 아래에서 밀짚 모자를 눌러싼 여씨의 손에는 훤칠하게 생긴 아들의 사진과 태극기를 집어넣은 전단,그리고 재해 현장에서 주운 아들의 명함이 들려있었다.이 곳에선 119구조팀 15명과 교민 등 20여명이 포크 레인을 동원해 건물 잔해를 파헤치고 있다.

▶ 여연회씨가 지난해 31일 오후 아들이 실종된 숙소 근처에서 최영진 외교통상부 차관을 만나고 있다.

류해운 구조대장은 "지금까지 10여구의 시신을 수습했으나 한국인 실종자는 한 명도 없고 태국 현지인과 일본 관광객이었다"고 설명했다.

여연회씨의 곁에선 새로 안사돈이 된 김재임씨가 여씨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김씨의 딸이자 여씨의 며느리인 이혜정(26.유치원 교사)씨는 사건 초기에 다행히 시신을 찾아 12월 29일에 화장 절차를 끝냈다.현지 관계자는 "상반신이 콘크리트 지붕에 깔린 채 숨졌으나 옷.반지.귀걸이 등으로 신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딸과 사위가 1년 전에 만나 그렇게 서로 좋아 하더니만…"이라며 말을 잊지 못하자 옆에 있던 여씨가 "아들이 바빠서 혜정이를 만날 시간이 없다고 늘 아쉬워했다"고 화답했다.두 안사돈은 "이럴 줄 알았으면 서로 실컷 만나게 해줄낀데…"라고 씁쓸하게 웃었다.여씨는 "남들은 부모에게 푸껫 효도 관광을 시켜준다는 데 우리가 이런 일로 올 줄 누가 알았겠슴니꺼"라고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한국인 인명 피해가 가장 큰 태국의 푸껫에선 지금 시신 발굴과 장례식이 한창이다.구조대원과 자원 봉사자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리조트 단지인 카오락(1명 사망,3명 실종)에선 발굴 작업이,피피 섬(5명 사망,5명 실종)의 시신이 운반돼 오는 크라비에선 유족들의 확인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한국인 인명 피해(8명 사망,8명 실종)의 대부분이 카오락과 크라비에서 발생한 셈이다.

'지상 천국'이라고 불리웠던 카오락은 해일이 할퀸 상처 때문에 '지옥'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3-4층짜리 호텔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고 단층으로 지어진 방갈로 숙소들은 아예 푹삭 주저앉았다.뿌리채 뽑힌 커다란 나무들이 모래 속에 파묻힌 청바지와 여행 배낭,반쯤 먹다 남은 콜라 병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근처의 불교 사원엔 화장 순서를 기다리는 시신들이 관에 담겨 3겹,4겹으로 쌓여 있다.

크라비에선 피피 섬에서 두세 차례씩 시신이 실려온다.근처의 병원.사원엔 건물 바깥까지 시신이 즐비하다. 한국인 유가족과 법의학자 2명,교민 봉사자 등 20~30명이 시체들을 누비고 다니면서 8명의 실종자를 찾는 데 진땀을 흘리고 있다.시신들은 퉁퉁 불거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부패해 가족조차 신원 확인이 어려울 지경이다.

구조팀과 유족들을 격려하기 위해 푸껫에 온 최영진 외교통상부 차관은 "유족들이 원할 때까지 시신 발굴 작업을 펼치겠다"고 밝혔다.현지 관계자는 "카오락에서만 사망.실종자가 2000명을 넘을 것"이라며 "태국 정부가 시신 부패 속도 등을 감안해 조만간 발굴 작업을 종결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푸껫(태국)=이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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