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젖줄 '자연' 희망을 읽는 책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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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옛 체코슬로바키아 작가 카렐 차페크(1890~1938)는 과연 연구대상 작가다. 1920년 발표한 희곡 『R.U.R(Rossum's Universal Robots)』에서 그는 생산과 효율만 따질 뿐 얼굴은 온통 무표정 일색인 만원 전철 안의 인파에서 착안, '로봇'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한 주인공이다. '일한다(robota)'는 뜻의 체코어에서 따온 말이다. 오늘날 너무도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로봇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계기다. 로봇을 등장시켜 현실사회를 비판했던 차페크의 관심은 『R.U.R』와는 작품 경향이 1백80도 다른 반대방향으로 튀기도 했다. 이번주에 나온 신간 『원예가의 열두달』(맑은 소리)이 그것이다.

사전 지식이 없다면 이 작품이 차페크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원예가의 열두달』은 흙을 터전으로 삼아 온갖 화초와 작물을 재배하는 원예광들의 사계절을 그려내고 있다. 말하자면 조선조의 대표적인 사대부 강희안의 명저술로 꼽히는 『양화소록(養花小錄)』(국내에서 두어번 한글 번역이 돼 출간됐다)의 20세기 유럽 버전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의 서술은 유머러스하다. 무슨 마법의 힘을 사용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중하고 엄숙하게 씨받이용 흙을 장만하는 원예가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한다.

"삼년 지난 쇠똥, 완성된 두더지집 한 움큼, 엘베강의 모래(지류인 몰다우 강은 안된다), 목걸이를 한 처녀가 묻힌 묘지의 흙 등을 골고루 섞는다". 이후 곧바로 "흙을 만드는 데 초승달이 뜨는 밤이 좋을지, 보름달이 뜨는 밤이 좋을지, 한여름 밤이 좋을지는 그 어떤 원예책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조크를 능청스레 덧붙이기도 한다. 시멘트에 둘러싸인 도회지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땀 흘리는 즐거움, 여기에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원예의 독자적인 매력 등을 담아낸 이 책은 여느 책에서 맛보기 힘든 매력을 담고 있다.

했더니만 『원예가의 열두달』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을유문화사에서는 『꽃과 나무』를, 보리에서는 『무슨 나무야』를 잇따라 내놨다. 북한의 『식물원색도감』『조선식물원색도감 1,2』가 원작인 『무슨 나무야』가 5백종이 넘는 식물에 대한 군더더기 없는 요약에 그림을 곁들인 도감이라면, 『꽃과 나무』는 꽃·나무 60여종에 얽힌 일화와 상징적인 의미를 도상과 함께 실어 읽을거리 상품으로 선보이고 있다. 그 뿐인가. 지난 주에는 생태계의 모든 구성 주체들을 상호작용하는 전체로서 파악하는 생태학의 발전과정을 추적한 『생태학-그 열림과 닫힘의 역사(아카넷)』가 출간되기도 했다.

이쯤되면 환경·생태·자연이라는 화두가 출판계의 관심을 끄는 분명한 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그런 관심은 독자 대중의 입맛을 순차적으로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불과 10년전만 해도 꽃과 나무, 채소들은 먹을 수 있는지, 약재로 쓰일 수 있는지 등 유용성에 따라 취사가 결정됐을 것이다. 배고프지 않은 포만의 상태에서 바라보는 파릇파릇한 것들은 갈수록 관심사가 다양해지는 과정 속에서 전문적인 취미생활의 대상으로 역할이 바뀌고 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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