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한 말장난 …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긴급조치란 용어는 신세대에게 분명 생경할 것이다. 유신 시대 군사정권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각종 정치적 집회를 긴급조치란 행정력으로 원천 봉쇄했다.

그러고 보니 좌익세력을 척결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발본색원(拔本塞源)이란 단어도 잊은 지 오래됐다.

국제화·세계화가 국가적 명제인 2002년에 그 긴급조치가 되살아났다. 그런데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수많은 사람을 옥죄었던 긴급조치가 코미디 영화의 소재로 돌변했다. 지난해 '조폭마누라'가 성공하자 "돈을 부대로 긁어모았다"고 말했던 개그맨 서세원이 새로 만든 '긴급조치 19호'(김태규 감독)가 그것이다.

영화는 긴급조치를 최대한 상업화했다. 마구잡이 욕설과 유치한 농담, 그리고 시끌벅적한 액션이 지배했던 '조폭마누라' 코드에 부모·자식간 대화 단절과 문화에 무지한 정치권에 대한 풍자를 덧붙여 고단위의 폭소를 자아낸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수미일관한 구성이나 영화가 끝난 뒤에 남는 여운을 기대할 필요는 전혀 없다. 순간순간 터져나오는 개그적 웃음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미국·일본 등 선진 각국에서 가수 출신의 연예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청와대 측이 한국 가수들의 공연을 전면 중단하고, 노래를 하는 가수들을 속속 잡아들인다.

그런 와중에 청와대 비서실장(노주현)과 그의 딸이자 가수 홍경민의 팬클럽 회장인 민지(공효진)가 대립한다. 결국 긴급조치는 해제되고 반목했던 부녀도 화해한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겉으론 제법 정치 비판적인 발언을 하려는 듯하다. 인기 가수이자 주연 배우인 홍경민과 김장훈의 입을 통해 힘만 앞세우려는 정치권을 신랄하게 비꼰다. '정치나 노래나 모두 사람을 즐겁고 편하게 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정치권'을 야유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차원이 낮다. 또한 신파적이다. 일반 대중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에도 영화라기보다 장편 TV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다. TV만 틀면 언제나 볼 수 있는 인기 가수·개그맨 60여명이 단체 출연해 마치 대규모 토크쇼마저 연상케 한다.

1970~80년대 시위 장면을 다큐멘터리로 재연하는 등 사실성 확보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이나 한국사회의 모순을 풍자한 블랙 코미디로 보기엔 거리가 한참 멀다. 연예계의 '파워맨' 서세원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것이다. 기성세대에 대한 신세대의 반감을 도드라지게 엮어낸 이 영화가 젊은 관객의 호응을 얼마나 받을지 두고 볼 일이다. 19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