宰相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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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총리'라는 관직이 처음 생긴 것은 조선 말인 1880년 12월 21일(음력)이다. 강제 개항 이후 밀려오는 외세 관련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만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책임자가 '총리대신'이다. 초대 총리는 영의정이던 이최응(最應·대원군의 형). 총리는 개항 이후 시대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정부조직 개편에서 영의정을 대체한 최고공직인 셈이다.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은 『경제문감(經濟文鑑)』에서 영의정에 해당하는 '재상(宰相)' 벼슬을 "만기(萬機·주요 정무)를 요람(要覽·뽑아 살피다)하는 자리"로 정의했다.이어 '위로는 군왕(君王)을 모시고,아래로는 백관(百官)과 만민(萬民)을 다스린다'고 설명했다. 흔히 말하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다.

위로는 임금만 있고,나머지는 모두 그 아래라는 뜻이니 위상이 막중하다. 정도전이 재상을 중시한 나름의 논리는 '임금은 세습인지라 현명할 수도 있고, 우매할 수도 있다.그러나 재상은 임명직이기에 항상 유능한 사람을 앉힐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왕은 재상에게 권력을 주고,재상은 그 권한으로 왕을 잘 보좌하면 국정이 원활하게 돌아간다는 기대다. 그 틀 위에서 조선왕조는 5백년이나 이어졌다.

그런데 근대적 의미의 '총리' 자리는 출발부터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일제강점기 국무총리라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업고, 실질적 행정권은 상해에 있는 총리(이동휘)가 맡게하자는 정치적 발상에서 '대통령+국무총리' 구조가 만들어졌다.

해방 후 제헌의회 헌법기초위원회는 처음 내각책임제를 택했다.그런데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중심제가 아니면 하야해 개헌 국민운동을 벌이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집권당(한민당)과 이승만이라는 거물이 타협한 결과 역시 '대통령+국무총리'다.

김대중 정부의 총리는 모두 자민련 출신 정치인(김종필-박태준-이한동)이었다. 대선과정에서 자민련이 후원한 데 대한 정치적 보상인 셈이다. 헌정 최초라는 여성 총리의 운명 역시 정치적 타협의 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운명은 어쩌면 54년 전 오늘(제헌절)부터 정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오병상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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