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 평화 도보 대장정' 끝마친 원 공 스님:"길이 곧 佛心… 절에 왜 갇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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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달 30일 일행 11명과 함께 대구종합경기장에 도착,1백23일간 장장 4천㎞에 달하는 '한·일 평화 도보 대장정'을 끝낸 원공(圓空·58)스님을 지난 10일 오후 4시 충북 진천에서 백곡으로 넘어가는 좁은 길 위에서 만났다. 서울의 도봉산 천축사 우문관에서 6년 간의 면벽 수행을 마친 1979년 이후 한번도 차를 타지 않은 원공 스님은 대원들을 모두 보내고 홀로 무문관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대장정을 탈없이 끝낸 뒤라 그런지 구릿빛 얼굴에 미소가 자주 피어났다.

"열두명이 차도를 따라 걷는다는 게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어. 별 탈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 다 떠나 보내고 이렇게 걸으니 홀가분한 걸…."

스님은 여름이라서 서둘러 걷기를 끝내고 가까운 산속에 짓고 있는, 청주 보문정사의 복지시설 정진원을 찾았다. 스님의 도반(道伴)으로 2000년 열반한 정진(正眞)스님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원공 스님은 이제 체력이 옛날같지 않아 절이 산속 깊이 파묻혀 있으면 하루 묵을 거처로 선뜻 정해지지 않는다며 웃었다. 그곳에서 정진스님의 사진을 만지며 "내가 먼저 가야지 어떻게 자네가 먼저 …"라는 스님의 맘이 어떤지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이튿날 스님의 표현을 빌리면 '새 날은 시작되는데 너희들은 등짝 붙이고 왜 미적거리느냐'는 백구의 짖음에 떼밀려 정진원을 나온 것이 오전 1시. 보문정사의 주지 묘정 스님이 김으로 만 주먹 밥과 김치를 챙겨 주었다. 스님의 배낭엔 그 외에 옷가지 몇 점과 우산뿐이다.

길로 나서자마자 스님은 하늘부터 올려다 보았다. "저렇게 많은 별, 서울에서는 보기 힘들어…. 새벽에 하루를 열면 이런 상쾌함을 덤으로 얻을 수 있어 좋지."

세속의 명예와 부귀에 철저히 눈을 닫은 채, 나물밥만으로 허기를 달래며 길 위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으로 다스리는 스님에겐 누가 뭐래도 자연이 최고의 도반임에 틀림없다.

일본이 처음인 스님은 그쪽의 문화에 좋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특히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했던 교회와 성당, 절에서 배타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고 한다. 종교 간 대화가 구호만큼 활발하지 못한 우리나라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성경에도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장 3절)는 구절이 있어. 순수해야 한다는 말이지. 자꾸만 다른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를 가두면 곤란해. 자연 앞에 서보라구. 그 앞에서는 종교를 논하기 힘들어져. 귀를 열고, 맘을 열면 내 종교 네 종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

일본인, 특히 기자들에 대한 칭찬이 많았다. 취재 대상을 괴롭히지 않는다든지, 이벤트의 성격이 훌륭하다고 판단되면 도보행진에도 직접 참가하는 열의를 보이는 등 프로정신이 강하더라는 것이다.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기타큐슈로 넘어가면서 간몬(關門)터널을 건너야 했을 때 문명의 이기를 타지 않는다는 스님의 원칙 때문에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20여년 만에 열어야 했는데 이 때도 현지 기자가 일을 매끈하게 처리해줬다고 한다.

또 한국과 달리 어딜 가나 인도가 있는 일본의 인간중심 사상이 스님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시골로 벗어나면 차도만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틀 동안 16개의 굴을 건널 때도 큰 불편이 없었다는 것이다.

스님의 성격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대장정에 동참했던 윤보현씨가 들려줬다. 일본에서 한 기자의 '왜 걷습니까?''지금까지 얼마나 걸으셨습니까?'라는 질문에 스님은 '인간은 직립동물이니까''무(無)'라는 글로 각각 대답했다고 한다.

그 대목에 대해 스님에게 쉽게 설명해달라고 주문했다.

"숫자를 말할 필요가 있어? 숫자를 대면 대중은 거기서 수행력을 재려고 할테고, 어쨌든 숫자는 내가 걷는 이 수행의 진실과는 관계가 없어." 불교계에서 도보수행 또는 만행(萬行)수행으로 불리는 스님의 수행에 담긴 깊은 뜻을 온전하게 전할 수 없다는 말일 게다. 이 대목에선 '수행으로 공부를 이루되, 그 공부는 발우의 손잡이 같이 쓸데없는 것이니 그것을 불에 던져 넣어야 한다'며 후진들에게 끊임없는 정진을 요구했던 경봉(1892~1982)스님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원공 스님은 자신의 수행을 두타행(頭陀行)으로 정의했다. 두타가 닦고, 털고, 버린다는 뜻이니 의식주에 대한 탐심을 버리며 심신을 닦는 스님의 수행이야말로 두타행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연중 반 정도를 길에서 보내는 스님으로서 늘 새벽에 일어나 길을 재촉하면 수행자로서 기도는 언제 할까.

"법당에 갇히지 않아. 곳곳에 부처가 있는데…."

비켜가는 길, 올라가는 길, 내려가는 길, 돌아가는 길, 그 어떤 길이든 어디로든 통함이 있고, 그 통함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길 위에 서면 어떤 깨달음으로도 연결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날 스님이 갈 길은 용인까지 1백20리. 70리 길이 되는 안성에서 스님은 기자를 '놓아'주었다. 스님이 사준 팥빙수를 차 안에서 먹으면서 기자는 여러모로 시원함을 느꼈다. 그리고 오전 4시 조금 넘어 천주교 배티성지 앞에서 먹은 주먹김밥이 언젠가 그리워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안성=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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