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여성 바라보는 뻔뻔한 남성의 시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13세기 몽골군 침입 이후 고려는 원나라 사위국가로 추락했다. 지배기간은 장장 1세기. 그동안 "야만의 풍속을 본받지 말라"고 했던 고려태조의 훈요십조는 헛구호가 됐다. 만두(雙花)·소주 같은 먹거리도 그때 반입됐고, 예전 시골에서 나그네를 공대하는 풍속도 알고보면 몽골의 유목민 법률 영향이라고 한다. 원나라 공주로 고려 왕비에 올랐던 이가 7명이 배출된 그 시절, 궁중용어 일부도 몽고풍으로 바뀌었다. 왕의 존칭인 마마(殿下)가 그때 등장했고, 마누라·무수리 등도 그렇다. 침략과 피침(被侵)이 문명교류의 한 통로이기도 한지라 새삼 그걸 탓하자는 게 아니다.

전란시 최악의 희생양이 되게 마련인 여성 수난사를 되새겨보기 위함이다. 몽골 침입 때만 해도 강제징발돼 이국 땅에 간 공녀(貢女)만 1만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원나라 하층민·처첩으로 비운의 삶을 살아야 했다. 여성들에게 더 비극적이었던 임진왜란은 대강 안다치고 건너 뛰자. 점령군 주둔기간이 1년이 채 못됐던 17세기 초 호란(胡亂)때도 여성 수난사는 예외없었다. 청나라는 순전히 몸값 확보를 위해 여염집 규수들을 전리품인 양 끌고 갔다. 나중 사대부들은 파산을 감수하고서라도 돈을 끌어모았다. 조정도 함께 뛰었다.

해서 모은 1인당 50석이라는 거액으로 '돈 주고 사람 데려오는' 속환(贖還)추진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돌아온 여성들, 즉 환향녀(還鄕女)를 보는 조선 땅 남정네들의 엉뚱한 시선이었다. 정절을 잃고 돌아온 여성들은 줄줄이 이혼을 당했다. 왕까지 나서 그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며 말렸으나 가문축출은 기본이었다. 오늘날까지도 화냥년이란 말은 '서방질 하는 계집'이란 멸시의 뜻으로 쓰이고 있으니 정말 어이없다. 예나 지금이나 이 땅 남성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는가 보다 싶다. 3백년을 건너 뛴 '대~한민국' 우리 시대. 상황은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아니 외려 나빠졌다.

보름 전 리뷰한 책 『동맹 속의 섹스』(캐서린 문 지음, 삼인)는 양공주 1백만명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양공주들을 화냥년 취급해온 한국사회를 고발한 다음 대목이 특히 가슴을 울린다. "양놈과 몸을 섞었다는 사실 만으로 그들은 몸도 영혼도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닌 '불순한 존재'로 여겨졌다. 이들이 '정상적인' 사회로 통합되는 것은 불가능했다."(22쪽) 어떠신지. 이 대목을 읽으며 앞의 얘기가 나오는 책 『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중심, 2001) 속의 한국여성 수난사가 내 머리 속에서 뒤엉켰다. 그 책이 미국 컬럼비아대 출판부를 통해 나와야 했고, 겨우 번역 출판돼야 하는 게 바로 우리네의 딱한 형편이다. 이 땅의 남자라는 게 부끄런 대목이다.

기억하시는지? 『동맹 속의 섹스』 리뷰를 기자는 윤금이씨 망자(亡者)의 혼이 내뱉는 독백의 방식으로 한번 꾸며봤다. 윤씨? 꼭 10년 전 미군사병에 의해 비극적으로 살해된 양공주 여성이다. 했더니 나중 한 동료가 씩 웃으며 물었다. "윤금이씨 원혼이 혹시 조선배의 꿈에 나오지 않던가요?" 밝히지만 윤씨는 내 꿈에 치맛자락 한번 내비치지 않았다. 당연한 노릇이다. 내 판단은 이렇다. 이 땅에서 수난당한 여성들의 한풀이는 기사 한두 번, 약간의 관심 정도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종류의 사안이라서 그럴거라고.

<출판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