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한마디 유머가 세상을 바꿉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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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늦가을. 방송국 아나운서 공채 시험에 5년간 도전, 무려 일곱 차례나 쓴잔을 마신 그로서는 정말 마지막 기회였다. MBC 남자 아나운서 시험에 지원한 500여명 중 최종 면접까지 올라온 이는 세 명.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할 수 있지만 최후 진검승부에서 미끄러진다면 그야말로 '말짱 도루묵'. 다시 기약없는 우울한 백수로 복귀하는 것만은 끔찍이도 싫었던 그는 비장하게 면접장을 찾았다.

사장단의 면접은 '엄숙' 그 자체. "아나운서의 가장 중요한 소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확히 1분간 뉴스 진행자 스타일로 자기 소개를 하라" 등등. 두 눈을 부릅떴지만 숨이 턱 막힐 듯한 딱딱한 분위기 탓이었는지 그는 한두 차례 말을 떠듬거리고 말았다. '또 떨어졌구나.' 그런데 이게 웬일. 면접이 끝나려 할 때쯤 한 면접관이 "우리 너무 지루하니 한번 웃겨보지"라며 엉뚱한 '문제'를 내는 것이었다.

첫째 응시자가 나름대로 시중에 유행한다는 '개그'를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반응은 썰렁~. 그의 차례가 됐다. 그는 평소 장난삼아 몇 번 해봤던 이른바 '개인기'를 선보였다. "아, 이 사람 한번 뽑아봐. 지금까지 일곱번이나 떨어졌지만 인간성 하나는 끝내준다니깐. 내 말 믿고 한번 써보라고, 뿜빠라 뿜빠 뿜빠바." 면접관들의 나이가 지긋했기 때문일까. 코미디언 서영춘씨의 성대모사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면접장은 삽시간에 웃음 바다로 바뀌었고, 이에 신이 난 그는 개그맨 김국진, 방송인 이다도시의 성대모사로 연이어 히트를 쳤다. 그는 결국 9회 말 만루 홈런으로 7전8기를 이룬 셈이다. 현재 방송가에서 한창 뜨고 있는, '웃기는 아나운서' 김성주(32)씨의 합격기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떨렸지만 시험에 워낙 많이 떨어져 이골이 났다고 해야 할까요. 막판으로 몰리니 오히려 마음이 담담해졌고, 그래서 압박감이 심한 순간에도 나름대로 여유를 찾을 수 있었던 거죠. 그때 경험은 제 아나운서 생활을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품위는 지켜야겠지만 시청자들이 나를 보면 '즐겁다, 편안하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는 거죠."

웃음이 노화를 방지하고, 최고의 보약이란 말은 이제 상식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유머'는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강력한 무기가 됐습니다. '못생긴 건 용서해도 웃기지 못하는 남자는 참을 수 없다'든지, '지도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은 유머 감각'이란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상황입니다.

새해가 밝아옵니다. 새해엔 활짝 웃고 삽시다. 아니 다른 사람이 배꼽 잡을 수 있도록 웃기며 삽시다. 이 불황에 무슨 그런 한가한 소리냐고요. 어려우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힘들수록, 위기일수록 더욱 빛나는 한 방, 그게 바로 '유머'의 참뜻 아닐까요.

글=최민우 기자<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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