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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나를 울리는 나의 모국이여” … 시인 유치환 탄생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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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오늘은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1908~1967)이 산성(産聲)을 울린 날이다. “이 시는 나의 출혈(出血)이요 발한(發汗)이옵니다”(『청마시초』 서(序)). 그는 일제에 나라를 앗기기 두 해 전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아비규환의 동족상잔과 질곡의 독재가 펼쳐진 시대를 살며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노래하면서도 사회 모순에 눈감지 않은 참여 시인이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이 시 ‘깃발’이 실린 『청마시초』가 세상에 나온 1939년은 일제가 일본어 상용정책을 펼친 이듬해였다. 식민지 조선은 푯대에 매달린 깃발처럼 ‘맑고 곧은’ 시인의 이상을 펼치기 힘든 속박의 땅이었다. 민족의 얼인 말을 앗아간 일제가 혼마저 뺏으려 했던 창씨개명이 강요된 1940년. 유치환은 식솔과 함께 북만주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그때 거기도 ‘암담한 진창에 가친 철벽 같은 절망의 광야’(‘광야에 와서’)였지, 그가 그리던 자유로운 대지가 아니었다. ‘인사를 청하면/검정 호복(胡服)에 당딸막이 빨간 코는 가네야마/…아아 카인의 슬픈 후예 나의 혈연의 형제들이여/우리는 언제나 우리 나라 우리 겨레를/반드시 다시 찾을 것을 나는 믿어 좋으랴’(‘나는 믿어 좋으랴’, 『생명의 서』, 1947). 시인이 만주 땅에서 만난 동포들은 일본식 이름을 쓰며, “개중에는 일제의 위세를 빌려 그것이 마치 제 것인 양 내세워 본토인을 모멸하고 착취하려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수밖에 없던, “아무리 일제의 독수가 악착같다 할지라도 이 같은 후미진 광야 끝에서야 그 치욕스러운 창씨라는 것쯤 않고서도 모면”(‘나의 시 나의 인생’, 『구름에 그린다』, 1959)할 수 있던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창씨개명하지 않았다. 동포들의 부일(附日) 행동에 실망하기보다, 암울한 상황에서도 언젠가 올 미래를 위해 민족의 존재를 마음속에 다져넣었다.

‘적을 골탕 먹이게 진정 적에게 내주고 싶은 나라/이런 나라를 위하여/무슨 인과(因果)로 우리는 싸워야 하느냐고/나는 그의 자식 거지/그의 곁에 붙어 있으며/언제나 나를 울리는 이 나의 모국이여’(‘나의 모국’, 1951). 해방 후 그를 숨 막히게 한 동족상잔의 와중에서도 못난 조국을 사랑했던 역설(逆說)의 시인은 3·15 부정선거가 획책되던 독재의 질곡 속에서도 울기를 멈추지 않은 목탁이었다. ‘들어 보라/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 쳐 오는/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여기 진실은 고독히/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동아일보, 1960.3.13).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노래한 ‘생명파’ 시인이란 통념과 달리 그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그리며 자신을 쉴 새 없이 담금질한 앙가주망(engagement)의 시인이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