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의 父情 … 악역도 좋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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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에이즈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동성애자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변호사('필라델피아'), 지능은 낮지만 삶에 대한 개척정신을 결코 잃지 않는 청년('포레스트 검프'), 강한 책임감으로 부하들을 돌보는 엘리트 군인('라이언 일병 구하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2년 연속으로 받은 베테랑 배우 톰 행크스(46)의 이미지는 그의 출연작들이 잘 말해주듯이 선량함과 성실함으로 요약된다.

실제 생활에서도 영화배우인 두번째 아내 리타 윌슨과 소문난 잉꼬 부부이며 지난해 9·11 테러 때는 희생자 돕기 모금 생방송에 발벗고 나서는 등 지극히 모범적이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기관총을 난사하는 냉혹한 살인청부업자라는 의외의 행보에 나섰다. 드림웍스와 20세기 폭스가 공동 제작해 13일 미국에서 개봉하는 갱 영화 '로드 투 퍼디션(지옥으로 가는 길)'에서다.

데뷔작 '아메리칸 뷰티'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쥐면서 단숨에 할리우드의 총아로 떠오른 샘 멘데스 감독의 두번째 작품인 이 영화에는 행크스 외에도 폴 뉴먼·주드 로 등 내로라 하는 스타들이 출연한다. 미국의 연예 전문지 버라이어티는 내년 오스카상을 받을 가장 강력한 기대주로 이 영화를 꼽고 있다.

행크스가 맡은 역은 1930년대 시카고에서 활약하던 아일랜드계 갱단의 2인자 마이클 설리번. 이 영화는 양아버지이자 갱단의 대부인 존 루니(폴 뉴먼)가 그를 총애하자 이를 질투한 친아들이 설리번의 아내와 아이를 살해하면서 빚어지는 비극을 그렸다. 설리번과 살아남은 큰아들은 6주 동안 도피 여행을 하면서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애틋한 정과 이해를 나누게 된다.

지난 달 28일 시카고에서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행크스를 만났다. 인터뷰 장소인 리츠 칼튼 호텔에 넥타이를 매지 않은 남색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쏟아지는 질문에 성의있고 재기발랄하게 답변을 했다. "페니 마셜(그의 출세작 '빅'의 감독)이 당신이야말로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로 거물급 킬러를 연기할 배우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 기자가 말문을 열자 "오, 그녀는 노스트라다무스다!"라고 응수해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로드 투 퍼디션'의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을 때 악역 맡는 것을 주저했다고 들었는데.

"그 역할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동기만 있다면 악역도 마다하지 않는다. 내가 왜 이 역을 연기하는지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다면 관객들도 내 변신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내 얼굴이 선량하게 생겼나?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얼굴을 바꿀 수야 없지 않나(웃음). "

- 마이클 설리번은 어떤 인물인가. 당신의 해석을 듣고 싶다.

"설리번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무척 강한 남자다. 양아버지가 고용한 청부업자인 맥과이어(주드 로)의 총에 맞아 죽는 마지막 순간에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거듭 말하는 이유도 자신이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최고의 암살자이자 최고의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라고나 할까."

영화 제목은 중의적이다. '퍼디션(perdition)'은 자신을 쫓는 갱단을 피해 설리번 부자가 향하는 마을 이름이다. 동시에 아들만큼은 가지 않았으면 하는 지옥 같은 인생을 뜻한다.

행크스는 각본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를 떠올리며 "'악행은 몇 배의 되갚음을 받는다'라는 성서의 구절이 떠올랐다"면서 "폭력과 피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전철을 아들이 밟지 않길 바라는 아버지의 애절한 본능이 나를 매혹시켰다"고 말했다.

- 폴 뉴먼과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은 대사는 없지만 많은 걸 전달하고 있다. 조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양아들과 다정하게 피아노를 치는 아버지를 친아들은 애증과 질투에 가득찬 눈으로 응시한다. 결국 아버지는 친아들을 위해 양아들을 희생하기로 결정하지만…. 다행히 우리 둘다 피아노를 칠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럴싸하게 찍을 수 있었다."

그간 스티븐 스필버그·로버트 저메키스 등 할리우드의 간판 흥행감독들과 일해온 그는 "샘 멘데스를 비롯해 스티븐 소더버그·폴 토마스 앤더슨 등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쌓아온 사람들과 손 잡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드림웍스의 선택을 크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공동주연을 맡아 스필버그 감독의 '캐치 미 이프 유 캔'을 찍고 있다. '로드 투 퍼디션'의 한국 개봉은 9월이다.

시카고=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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