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교회 김 삼 환 담임목사>"한국 교회,인간에 눈돌릴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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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새벽 예배로 유명한 서울 명일동 명성교회(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담임인 김삼환(58) 목사의 인터뷰를 24일로 잡아 놓고는 도대체 이 교회의 새벽 예배가 어떻기에 그렇게 명성이 자자한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 지난 22일 새벽 6시 예배에 맞춰 교회를 찾았다. 그 시간에 나온 신자가 무려 3천5백여명. 본당 1층의 좌석 2천 개는 모두 남자들의 차지였다. 토요일 새벽 예배는 특별히 남자 중심이기 때문이다. 김목사의 설교는 남자들을 위해 4년째 계속해오고 있는 성경공부로 이어졌다. 김목사가 이날 쉽게 풀어 들려준 성경 대목은 구약의 사무엘상서 29장 1~5절.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장인인 사울왕의 위협을 피해 적의 나라로 들어간 뒤의 이야기였다. 김목사는 마지막에 "우리가 제아무리 극한상황에 처하더라도 동료나 나라를 배반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예배가 끝난 뒤 직장으로,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신자들의 얼굴이 맑게 느껴졌다. 다음달 6일 창립 스물두돌을 맞는 명성교회의 등록교인은 5만5천명에 달하며 목사만 50명을 넘는다.

-1980년에 신도 20명으로 문을 연 작은 교회가 5만5천명의 대형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요.

"제 나름대로는 설교를 대화식으로 풀어 메시지를 쉽게 전달한 게 신도들의 사랑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당시 TV 프로그램들을 보니 진행자가 한 사람에서 두 사람으로 바뀌더군요. 설교 시간에 신자들에게 자주 물음을 던지는데, 저의 물음에 답하는 신자들은 자신도 설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하필이면 다른 나라에 없는 새벽기도를 그렇게 강조하십니까.

"그것 역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새벽기도에는 왜 젊은이들이 안 나오나 궁금했어요. 그래서 기도만이 아니라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넣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가족찬양 등으로 예배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지요. 3~4년 지나니까 신자들의 반응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는데 그게 이제 우리 교회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어요."

-남자를 특별히 표적으로 잡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까.

"가정에서도 가장의 권위가 떨어지고 사회에서도 남자의 위상이 크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남자들에게 실망과 절망을 딛고 일어설 정신적 에너지를 불어넣고 싶었어요."

-교회의 규모가 커서 좋은 점도 있을 듯합니다.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충족돼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저는 신자들에게 물질적 부담으로 작용할 설교는 하지 않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제 자신이 교회에서 헌금에 대한 압박감을 종종 느꼈거든요. 욕심을 안 낸다고 하면 거짓말이겠고, 남보다 욕심을 조금이라도 적게 부리려고 노력합니다."

-장남이 이 교회의 전도사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간혹 교회세습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해요. 큰 교회의 목회를 해보니까 정말 힘들어요. 아들에게 그런 어려움을 물려줄 생각은 없습니다. 저 혼자 충분히 개척하리라 믿습니다."

-오는 9월 열릴 예장통합 총회의 부회장 후보를 사양했는데.

"저는 지금의 목회활동에 만족합니다. 기독교계의 큰 일을 맡으면 그 사명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 할 것 같아요. 제가 부회장을 맡지 않는 게 총회를 위하는 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 일에는 전혀 욕심이 없고, 앞으로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계의 이미지가 예전만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수직적 관계와 인간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 중에서 한국교회는 대체로 수직적 관계에 치우쳐 있습니다. 봉사하고, 자신을 낮추고, 약한 자의 편이 되는 수평적 관계를 바로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신자들을 만나는 횟수를 묻자 김목사는 "설교 시간 외에는 신자들을 별도로 찾을 시간이 잘 나지 않아요. 솔직히 말해 많이 바빠졌습니다. 교인들이 속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요"라며 웃었다.

경북 영양 출생인 김목사는 장로회 신학대학과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한남대학교 재단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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