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제2부 薔薇戰爭 제4장 捲土重來 : 5천명 對 10만 관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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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관복을 다 입고 나서 수레를 타기 전 김흔은 정명부인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공자께오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익을 위하여 정의를 배신하지 않고, 나라가 위태로움을 당해서는 생명을 버리면서라도 책임을 완수하고, 벗을 사귀되 옛날 약속한 것이라도 잊지 않고 이행한다면 이 사람을 완전한 인물이라고 하겠다.' 내 비록 불충한 인물이나 어찌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정의를 배신할 것(見利思義)'이며, 어찌 '국가의 위태로움을 보고 생명을 버리지 않을 수(見危授命)'있겠소이까. 자, 그럼 부인,다녀오겠소이다."

수레를 타고 남편 김흔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아내 정명부인은 손을 흔들어 전송하고 나서 벽에 몸을 기대고 서서 이렇게 한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아, 님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그러나 님은 기어이 물을 건너시네."

정명부인이 탄식하였던 그 말은 고조선 때 뱃사공이 술병을 들고 강물을 건너다 빠져 죽자 그의 아내가 강가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에서 따온 노랫말이었다.

수레를 타고 궁궐로 들어간 김흔은 정명부인의 탄식대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대왕 김명으로부터 십만 대군을 총지휘할 대장군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아침 입궐하는 김흔과 아내 정명부인 사이에 벌어진 난세에 대처하는 『논어』를 통한 두가지의 처세방법에 대한 마지막 토론은 이중창(二重唱)처럼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난세에 있어 물러섬이 좋으냐,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좋으냐는, 같은 상황에 대한 공자의 두가지 가치관은 세월을 초월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준엄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김흔은 대왕마마로부터 대장군의 사령장을 받고 곧바로 달구벌로 급파되었다. 이때가 민애왕 2년 윤정월이었다.

이미 김양의 동평군은 철야현의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주야로 겸행하여 대구의 땅에 이르러 진을 치고 있었고, 십만의 관군은 대아찬 김윤린의 진두지휘 아래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때의 기록이 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김흔은 마침내 관군의 대장군이 되어 군사 십만명을 거느리고 대구에서 '청해진의 군사'와 대치하고 있었다."

기록에 나와 있듯이 '청해진의 군사', 즉 동평군의 군사는 불과 5천명.관군의 숫자는 10만명으로 그 숫자로 보면 감히 상대조차 되지 않은 명백한 열세였다.

그러나 김양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 월왕 구천(句踐)은 섶에서 자고 곰의 쓸개를 핥으면서 애비의 원수를 갚고 복수를 맹세한 후 불과 5천명의 군사로 오나라의 70만 군사를 무찔렀다. 비록 적군이 10만 군사라고는 하지만 오나라의 70만 군사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구천은 5천명의 군사로 70만 군사를 무찔러 복수를 하였는데, 우리는 어찌 5천의 군사로 10만의 적을 무찌르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나서 김양은 전군이 모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 백제의 장군 계백은 5천명의 결사대를 뽑은 후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서 쾌함만 못하다고 자신의 손으로 처자를 모두 죽이고, 황산들에 나와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은 우리 모두다 분투결승하여 국은에 보답하자.'"

그리고 나서 김양은 칼을 빼어 하늘에 뜬 백일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우리도 모두 분투결승하여 낡은 옛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펴며,반드시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어 국은에 보답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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